-친정엄마 이야기
이번 편은 친정엄마 시점으로 적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를 풀어감에 있어서
엄마와 저의 캐릭터,
살아온 배경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소 길지만,
충분히 적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것이
별로 없는 인생이었다.
나의 엄마는 나이 마흔에
나를 낳았다.
동네사람들은 노망이 났다고 했다.
돈도 없는데, 늙은이들이
늦둥이를 낳았다고.
1964년은
아직 그런 시절이었다.
가진 것 없는 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쩍 마른 송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엄마는 그 놈을 팔아
날 고등학교에 보내겠다고 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고등학교에 가기 전에
송아지는 우리집에서 사라졌지만.
회비 낼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려던 찰나,
친구의 권유로 근로장학생이 돼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떠밀리듯 경리로 취직했다.
버스회사 동료들과
모란시장에서 먹던
떡볶이 한 접시,
맥주 한 잔이
처녀 시절 추억의 전부다.
친오빠 집에 얹혀 지내다
올케언니의 권유로 덜컥 선을 보고,
결혼하고, 첫 아이를 품에 안은 게
겨우 스물 네 살.
그렇게, 엄마가 됐다.
연이어 아들을 낳고,
6년 만에 늦둥이까지 낳고 나자
선택권이 없었다.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래도 아직 삼십대 초반이었다.
첫 시작은 아이들 밥을
해주는 일이었다.
이제 학교에
도시락이 사라지고
급식이 생긴다고 했다.
도시락 싸다 하루가 가는
엄마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학교 급식은 문을 열었고,
동네 여자들 중에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삼삼오오 집에 모여
부업을 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생활비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반찬값이 아닌, 월급.
급식일은 고됐지만,
배식하고 남은 반찬들을
집으로 싸와서
아이들 저녁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다.
아이들은 크게 사고치는 것 없이
그나이 또래만큼 자랐고,
풍족하진 않지만
시골 단칸방에서 태어나
이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이라고 위안삼았다.
남편은 자존심이 센 사람이었다.
말이 좋아 목수지,
'노가다'로 불리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집에 올 때는
늘 옷을 말끔히 갈아입고 들어왔다.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일과를 마치고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이었다.
이것을 말리지 못한 것을
이따금씩, 후회하고 있다.
노가다는 몸이 재산인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남편은 자주 아팠다.
어깨를 수술하고, 그 다음엔 허리,
무릎... 성한 곳이 없었다.
관리비가 밀리고,
은행에 내야할 이자가
숨통을 조여왔다.
급식실보다 돈을 더 많이 줄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 도시에는
일자리가 많았다.
전부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언제든 자리가 났다.
그 즈음에는,
김치냉장고 붐이 일었다.
나는 김치냉장고 공장에 들어가
하루종일 조립을 했다.
잔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급식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돈이 모였다.
그 돈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이들이 커갈수록
남편의 병세는 점점 깊어져갔다.
사람들은
미리 발견했더라면 좋았을텐데...
라는 말을 건넸다. 위로였다.
허나, 미리 발견했다한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남편을 간호할 사람이 없어
공장을 그만두고
이번엔 동네마트 앞에서
분식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포장마차 옆 경찰서 직원들은
가끔씩 고개를 들이밀고
오뎅국물을 퍼먹고 가곤 했다.
심장이 괜히 뛰었다.
크리스마스라고
딸과, 친구들이 와서
꼬마전구를 달아주고
산타 장식을 놓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포차를 연지 이듬해,
남편이 세상을 떴다.
남편은 돈도 돈이지만
자식들한테 간 이식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의사의 설명을 들은 뒤
퇴원을 결정했고,
즉시 모든 치료를 거부했다.
원망스러웠으나
말릴 수도 없었다...
쉰을 갓 넘긴 남편보다
어린 자식들이
더 눈에 밟혔다.
자기 앞가림이나 겨우 하는 딸,
군대를 막 전역한 아들,
고등학생 막내까지...
슬픔은 사치였다.
할 줄 아는 것 중에
가장 자신 있는 것...
이번에는
공장 구내식당에
밥을 하러 나갔다.
근무환경은 좋지 않았다.
식당이 옥탑에 있어
가파른 철계단을
매일 오르내리며 일해야 하는
극악의 상황이었지만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폭설이 내려도,
폭우가 내려도,
새벽 4시 반이면
경차를 몰고 공장 부엌으로 향했다.
몸에서 여기저기 고장신호를 보내도
남편 없이 애들 다 결혼시키고
손주 하나씩 낳고 사는 게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누구보다 애쓰며 살았는데
자식들만 생각하면
왜 이리 미안한건지...
배가 남산만큼 나와서도
일하는 딸이 눈에 밟혀
조리원비라도 내주고 싶었다.
천만원이 넘는다니...
열심히 모은 300만원을
봉투에 넣어 건네면서도
입이 썼다.
그래... 좋은 엄마는 몰라도,
적어도
애들한테 짐은 되지 말자.
악착같이 아파트 융자를 다 갚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놓고,
힘들때면 국민연금 수령액을
들여다보면서
내 한몸 건사할 방법만
고심했다.
딸은 쌍둥이를 출산하고부터
안부전화 대신
아기사진을 무더기로 보내왔다.
그 사진을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카톡 프사를 매일 바꾸었다.
절로 웃음이 났다.
아침에 늘 보내주던
아기들 사진이 와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