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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장녀의 말할 수 없는 비밀

by 롸잇테리언







국민학생으로 입학해

초등학생으로 졸업했다.






KakaoTalk_20251124_122825378_01.jpg?type=w773 유치원 사진이 초딩처럼 보임






그때 그 시절부터,

내 생활기록부에는

늘 '책임감 있고 성실하다'는


말이 적혔다.




6년 내내.



KakaoTalk_20251124_122825378.jpg?type=w773 아홉살. 1년 먼저 학교 갔으니 여덟살 때군.







어찌보면 당연했다.



아래로 남동생이 둘 생겼고,

엄마아빠는 늘 바빴으니

내 앞가림은 내가 해야하는

상황이 꽤 많았다.





어른들은 나만 보면

"야무지다, 똑부러진다"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고



나는 그렇게

점점



또래답지 않은

성숙한 아이로 컸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는

카운슬러였다.




나한테 그걸 왜 묻는데? 싶은

사소한 트러블부터,


진로고민 (심지어 너 전교권인데?),


짝사랑 하는 선배 공략법까지.




더 웃긴 건,

뭘 안다고 나는 또

그걸 상담해주고 앉아있었단 사실이다.





이건 사회에 나와서도 계속됐고

스무살짜리가 10살 많은 선배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도 했으니

대충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청자'로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작, 내 속마음을 털어놓을 이는

많지 않았다.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내 상처를 그대로 내보일만큼

나는 용감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그들도 자신없어했다.





차라리

기댈 수 있는 나무 같은 친구,

동료, 딸, 아내, 엄마이고 싶었다.





맞다, K-장녀 증후군.




힘들어도 힘든 티 안 내고 버티는.


힘들다고 말하면

모두가 무너져버릴까봐

항상 꼿꼿히 허리를 펴고 서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를 키우면서

나는 자꾸 내 바닥을 드러냈다.

감추려 할수록

우물은 더 가파르게 말라갔다.






KakaoTalk_20251124_123115289_01_(1).jpg?type=w773 예뻐도 힘든 건 사실입니다






세상천지 해맑게 웃으며

꼬물거리는 아이들에게

"그만 좀 해!!!!!!!!!!!!!!"

악을 지르고 나면,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


하는 자괴감에 빠졌다.






정말이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같은 것.



알고보니 보잘 것 없었던

나의 인성, 도덕성, 신념.







KakaoTalk_20251124_123115289.jpg?type=w773 한밤 중의 서커스


KakaoTalk_20251124_121520298.jpg?type=w773 육아난이도 몇?


KakaoTalk_20251124_121549114_01.jpg?type=w773 얌전...?


KakaoTalk_20251124_121549114_02.jpg?type=w773 덤벼보시지!








하나의 난관은 더 있었다.




육아로 인해 내 업무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완벽하게 증명하기 위해

이 악물고 붙잡았던 나의 일.







아이랑 씨름하다가도

전화가 울리면

목소리부터 바꿔야 했다.




다리에 붙어있는 아기들을

눈짓으로 엄마에게 토스한 뒤

방문을 잠갔다.









KakaoTalk_20251124_121322022.jpg?type=w773 작가이기만 했던 시절










방송작가는 을이 아니라

정 이라는 말이 있다.




갑-을-병-정 중에 .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화려하고 익사이팅한 직업같지만

몸과 마음이 모두 고된,

복합적인 직업이다.





당연히 대본이 까이기도 하고,

사소한 조율에 실패해

볼멘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전히 그렇다.






그럴 때마다 설명 또는 변명을 하느라

긴 통화를 하기도 하고,

언성을 높였다가,

다시 매달리기도 해야한다.






방송작가의 숙명은

역시 감정노동이거든.







힘들지만, 18년을 붙잡고 한 일이

이제와서 나를 아프게 할 리는

없다.











내가 힘들었던 건...

이 모든 과정을


내 딸만 믿고 살아온,

친정엄마가

줄곧 지켜봐야 했다는 사실이다.








엄마는 커피 한 잔 사먹는 것도

주저할 때가 많았다.



우리 사위가 매일 야근하며,

딸이 저렇게 쩔쩔매며 힘들게 번 돈...




아이들의 육아에는 분명

엄마의 쌈짓돈도 꽤 많이 들어갔지만

항상 내게 미안해하고

안쓰러워하셨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 꺼내오는 일은

어떤 직업을 가졌든간에

쉬운 일이 아니다.




엄마 역시 평생 고된 일을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내 자식이 그렇게 사는 걸

보고 싶은 부모는 없겠지.








본인은 평생 더울 때 덥고,

추울 때 춥게 일하셨으면서도



내 자식은 따뜻한 곳에서

책상머리에 앉아 일하니

다행이다... 생각하셨을 거다.

그게 위안이었을 거다.









그 마음을 알기에




장성한 뒤에

내 인격의 밑바닥,

내 삶의 밑바닥,


내 모든 밑바닥, 을

엄마에게 보여주는 일은

가장 힘든 일이었고,

지금도 어렵다.









KakaoTalk_20251124_121722510.jpg?type=w773











엄마는 내게 뭐가 되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지만

아이를 낳아보니



아이는 그냥 그 존재만으로도

내 인생 최고의 작품같은 거여서

흠이 날까, 평가절하를 받을까,

노심초사 하게 되는 존재였다.






(엄마 기준) 자신의 걸작이라

생각했던 내가

가까이 들여다보니

여기저기 깨지고 흠이 생긴

항아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엄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지만, 이상했다.




"엄마, 그냥 사~"

"엄마, 내가 케잌 시켜줄까?"




선심쓰듯 툭툭 안부를 던지던 때보다

이꼴저꼴 다 보여주며

부대끼며 지내는 날들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가리고 있던

베일을 하나씩 벗어가면서


진정한 가족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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