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시절의 나는
소위 말하는
서울깍쟁이 였다.
혼자 책 읽는 거 좋아하고,
학원 땡땡이 절대 안 치고,
책상에 선 그어놓고
넘어오지마! 를 시전하던
그런 아이.
그래도 유년시절을
거의 한 동네에서 보냈기 때문에
엄마 친구 아들, 딸 무리와
큰 카르텔을 형성했었다.
내 역할은 주로
엄마들의 지령을 받는 롤.
전문용어로 '일름보' 였다.
중학교에 입학하고서는
왜 나댔는지 몰라도,
반장이 돼서
나름 인싸처럼 지냈던 것 같다.
언젠가 글로 쓸 이야기지만
중2때 겪었던
충격적인 '왕따' 사건을
제외하면...
항상 친구가 있긴 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참 착해서
내가 문학특기생이라
따로 서울에 있는 아카데미를
다니거나, 백일장에 나가느라
자리를 비워도
내 몫의 프린트물과
필기를 잘 챙겨줬던 기억이 있다.
고맙게 생각한다.
서로 너무 다른 길을 가면서
연락이 뜸해지다,
끊긴 게 아쉬움이지만
모든 인연의 등장과 퇴장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 시절의 반짝임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도 있다.
대학에 가서는
과 생활보다
동아리 생활에 더 집중했었다.
그마저도 빠르게 취업하며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지만.
스무살에 여의도에 발을 디뎌
작가언니들 틈바구니에서
막내로 참 많은 예쁨을 받고
자랐다.
언니들은 나의 소중한 동료이고
동반자지만,
편히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손에 꼽는다.
아기가 없을 때야
일도 더 활발하게 했고,
시간도 많았으므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수월했다.
하지만, 아기를 낳고나서
나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직업의 특성상(?)
미혼이 많고, 딩크도 많아
내 고충을 완벽하게
이해해 줄 사람을 찾는 건
무리였고,
가장 사랑하는 작가언니는
그 즈음 암 진단을 받아
투병중이었다.
육아 동지를 만들어보려 해도,
쌍둥이를 양육하다보니
혼자 둘을 데리고
외출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아기띠로 매고 갈 수도 없으므로,
항상 유모차를 밀어야 하는데
유모차를 차에 싣고, 내리고,
아이 둘을 옮기고,
둘의 기저귀를 간다는 건
실로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부분 동시에 두 아이를
키워본 일이 없었기에
힘들겠다는 생각은 했을지몰라도
그 정도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소리까지 들어봤으니.
물론 단 한명이었지만.
난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멀어졌다.
마음씨 좋은 동네맘들이
불러주면, 간혹 맥주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공동육아를 해 본 적은 없다.
쌍둥이가 많아졌다지만
여전히 특수 캐릭인 쌍둥이 엄마.
그리고 워킹맘, 인데 이제..
재택 베이스인.
전업맘처럼 보이는데
워킹맘이라고?
이 무슨 혼돈의 카오스인가.
쌍둥이 엄마 방의 동지들은
대부분 육아에 혼이 나갔거나,
휴직을 하고 전업맘으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조리원에서 복직해
줄곧 일하는 쌍둥맘이라는
별스런 타이틀을 가진 나와는
또 약간의 괴리가 있었다.
그 어느 곳에도
딱 맞는 내 자리는 없었다.
(자영업 하는 쌍둥맘들은
공감해 주실 수 있으려나요..?)
그럼, 내게 친구가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에게는 무적의
'친정엄마'가 있지 않은가.
친정엄마는 나의 커피메이트이자,
내새끼 자랑을 원없이 해도
폭풍 리액션으로
말할 맛 나게 해주는 방청객이었고,
잠이 부족해
새벽에 일하다
책상에 엎드려 코를 박고있는
나를 흔들어
따뜻한 차를 내어주는
특급 비서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외로웠던 시절.
내 곁을 지켜준
거의 유일한 친구.
그 시절, 엄마는
외로운 나를 숨 쉬게 하는
숲이었고,
섬을 비추는 유일한 등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