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파워 E,
나는 대문자 I다.
8년 넘게 살았으면서도
앞집 할머니, 할아버지 빼곤
눈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폰만 들여다보고 살기 바빴던 나보다
밝고 활달한 성격의 엄마가
더 빨리 아파트의 사정들을
캐치하기 시작했다.
14층 아저씨는 약사래,
11층 할머니는 좀 아파보여,
1층엔 애가 셋이던데?
아파트 단지 내에는
어린이집이 있었지만
이상하게, 아이들이 놀이터에 나와
노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다 한번, 놀이터에서 마주치면
원장님은 우리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라며
살갑게 인사했지만
아이들이 그닥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아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자리를 피했다.
친정엄마는 내게 말했다.
"저긴 가까워도 안 돼.
애들이 하나도 안 재밌어보여."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생각해보면 이사에 대한 모든 힌트는
엄마가 줬다.
"근데, 이 아파트에는
애기가 너무 없네?"
정말이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원주민의 비율이 90%에 육박하고
임차인도 드물었다.
세대수가 워낙 적어서도 있지만
유독 아이가 없었다.
소아과를 가려면 좁은 길을
10분 정도 걸어야 하고,
가는 길에 길담배 하는 분들을
3팀 이상 꼭 마주쳤다.
우리는 유모차를 밀면서
한 손을 휘휘 저으며
항상 그 길을 지나다녔다.
언제까지 이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노심초사하며 다녀야 할까.
"엄마, 나 이사가고 싶어."
엄마가 재빨리 대답했다.
"가면 좋지."
엄마는 대단한 투자자는 아니었지만
우리를 키우면서
신축에서 또 신축으로
재건축 아파트 몸테크를 해가며
작고 소중한 돈을
소소하게 불린 경험이 있는 분이다.
본인이 도와주지 못하는 게
미안할 뿐,
우리가 이사를 결심하자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다.
시댁은 달랐다.
수년째 안 팔리는 지방 건물을
팔아서 보태줄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나쁜 의도라기보다
대출 떠안고 어떻게 살거냐,
하는 걱정이 크셨던 건데...
친정엄마 생각은 확고했다.
"감당 가능하면 괜찮아.
집을 누가 돈 다 주고 사냐."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엄마의 말에 용기를 냈다.
어린이집은 내년 3월에나
입소가 가능하다 하고,
18개월부터 24개월까지
마의 구간이 겹친 바로 그때!
나는 서울 곳곳의 아파트를
내 눈으로 보겠다며 임장을 다니고,
강의도 들어보고,
동시에 집을 치우고, 보여주는 일을
끝없이 반복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면
엄마의 품에서 잠든
내 새꾸들이 있었다.
집을 알아보는 일도
부동산을 순회하는 일도,
짐을 정리하는 일도,
엄마가 없었다면 못 했겠지.
(강의 듣는 날이면
애들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시고,
누가 집 보러 온다고 하면
청소에 애들 머리까지 싹 빗겨서
모델하우스와 모델을
만들어 두시기도 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을 보내고 싶었던 원에
극적으로 자리가 생겨
OT에 참석하던 날,
우리의 첫 집이 팔렸다.
이상하게도 내가 보여주면
감감무소식이던 집이...
내가 출근한 사이
슬쩍 보고 간
중년부부의 맘에 들었던 것이다.
엄마 사주에 토 기운이 강하다더니
엄마의 힘인가?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또 하나의
큰 산을 넘었다.
(이 시기에 엄마의 낡은 아파트도
새 주인을 만났고
엄마는 쪼금 더 좋은 입지에
다시 내집마련을 하셨다.
바야흐로... 우리가족의 격동기.)
아이들을 붙잡고,
"우리 이사간대~"
"새 아파트로 간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계속하는 엄마는
무척 즐거워보였다.
우리의 새 출발을
가장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
간절하게 내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길 바라는 사람,
항상 내 등을 떠밀어
올려주는 사람,
그건 바로 친정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