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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경문 Feb 19. 2022

엘리베이터 안에서

엘리베이터에 가득 찬 에스프레소 향기


월요일 출근길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산한 출근길 엘리베이터를 예상했는데 길게 늘어진 줄이 보였습니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엘리베이터 안도 만원이었습니다.


사람이 많고 답답해서 호흡도 가다듬을 겸 눈을 감았습니다. 순간 아침에 갓 내린 커피 향기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났습니다. 눈을 감자 코가 활성화되었나 봅니다. 누군가 출근길에 이토록 향기로운 커피를 들고 출근하다니 감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은은하고 향기로운 커피 향기는 다소 우울한 월요일(Blue Monday)의 초조한 아침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윽고 한분 두 분 저마다 근무하는 층에서 내리고 엘리베이터에 빈 공간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릴 때쯤에는 사람이 서있는 면적보다 바닥의 빈 공간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보았습니다.

바닥에 지저분하게 흘려진 커피.

제가 맡은 향기는 누가 실수로 바닥에 쏟아버린 커피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커피는 끈적끈적 사람들의 신발 바닥에 묻어 바닥이 엉망이었습니다. 아마도 출근시간이라 청소도 못한 것 같습니다.


찰나, 방금 전에 제가 느꼈던 평온함이 불쾌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 기분은 대체 왜 행복에서 불쾌로 변해버린 것일까요?

커피 향기가 갑자기 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저는 한동안 멍했습니다.

바닥의 커피는 죄가 없었습니다.
향기롭다고 느낀 것도 저이고, 불쾌하다고 느낀 것도 저였으니까요

그 짧은 순간에 제 감정이 파도처럼 출렁였습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 저는 인생에  있지 못할 아주 소중한 순간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커피 향기는 오랫동안 남을 것 같습니다.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더럽지도 아니하다


젊은 제자가 스승인 노(老)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거문고를 연주하시면 마음이 어떠십니까? 즐거우신지요 아니면 슬프신지요?"


노스님은 가만히 찻잔을 들어 보이며 물었습니다.

"지금 내가 마시는 차가 깨끗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더러운 것이겠느냐?"


"깨끗한 것입니다."


"나는 방금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잠시 후 이 차는 오줌으로 나올 것이다.

그러면 오줌은 깨끗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더러운 것이겠느냐?"


"그것은 더러운 것입니다"


오줌은 땅에 젖어 물기가 되고, 그 곁에 있던 도라지가 빨아먹고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면 그 도라지 꽃은 깨끗한 것이겠느냐 아니면 더러운 것이겠느냐?


"깨, 깨끗한 것입니다."


너는 너 편리한 데로 한잔의 물이 깨끗했다. 더러웠다. 다시 깨끗해졌구나.


반야심경에는 불구부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끗하지도 아니하고 더럽지도 아니하다는 뜻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따로 있지 않고,
좋은 일, 나쁜 일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좋은 말, 나쁜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보는 것


쑥스럽지만 작은 상을 받아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매스컴에 나와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리고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기쁘고 들떠있음도 잠시 몇 달 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 이름과 회사 직책을 사칭하는 사람이 협력사에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 겪어 보이는 일에 경찰에 신고도 하고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 좋거나 나쁘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직장에서 아무리 잘해도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입니다.

한 공간 안에 있다면 문제가 되지만 다른 공간(차원)에 있다면 부딪히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물이나 문제를 바라볼 때 그 공간이나 차원에서 잠시 나와서 생각해보면

사뭇 다르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한발 물러나 혹은 새로운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문제가 아닌 경우도 있죠.

더 큰 시각에서 볼 때, 그 일은 딱히 좋은 일도, 또 나쁜 일도 아니라는 것을 문득 알게 됩니다.



우리는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온 힘을 다해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것에 진심이었기에 상처받을 수 있고, 취해 있기에 깨어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공간에서 산책을 한다거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차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내가 아닌 내가 됩니다. 그리고 이내 복잡했던 그 일이 새로운 시각에서 단순해지게 됩니다.


엘리베이터 바닥에 쏟아진 커피에서 나는 향기가 저를 이끌어준 한 주였습니다.

바닥에 쏟아진 그 커피향기, 눈을 감고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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