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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 Sep 07. 2021

귀한 내 새끼보고 유기견이라뇨

유기견부심을 부려본다.




유기견이라는 단어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

유기가 뭔가 아무리 그래도 살아있는 생명인데.

했다가도

그래 자기가 낳고 키웠던 사람baby 

직접  손으로 죽이는 세상인데

강아지 따위야 유기하고도 남......나?






아무리 그래도 이 단어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유기'의 뜻을 정확히 다시 확인하기 위해

초록창에 쳐 보았다.




말 그대로

내다 버렸다

는 뜻이다.

당연하다.

당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니

온갖 새로운 감정들이 다시 생겼다.


유기견이라고 불렸던 강아지를 데려온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우리 개는 유기된 게 아니고 길을 잃은 걸 거야"

"이렇게 예쁜 애를 버렸을리 없어, 어쩌다가 잘못해서 보호소로 가게 된 걸 거야"

"아직도 얘 주인은 얘를 찾고 있을거야, 어느 날 갑자기 찾으러 오면 어쩌지?"



이 생각이 사실이건 아니건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정신건강이 

좋기 때문이다.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거,

내가 편한대로 내가  상처받는 대로 

생각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디서 어떤 학대를 당했고,

어떤 반려인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센터에 가게 됐고 

힘든 몰골로 얼마나  날들을 갇혀서 

보냈어야 했는지 

차라리 모르고 싶고,

정확히 신랄하게 모를  있어서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좌: 보호소에서 찍힌 사진                                                                        우:입양 직 후 찍은 사진










얼마   방송인이 방송에서 유기견을 

데려다 키우는  힘든 일이므로 추천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했다고 했다.

정확한 뉘앙스는 방송을 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앞으로도 영 모를 예정이기도 하다.


 분의 의도를 모르지는 않는다.

이미 충분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음성과 화면으로 '유기견' 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 자체가 내 강아지의 상처를 한번 더 들춰내고 후벼파는 것 같아서

먼저 영상을 볼 용기가 없다.



인간의 뇌는 백 번의 칭찬보다 한 번의 비난에

더욱 더 민감하고 예민하다.


유기견 입양이라는 내 행위를 좋게 평가하고

대단하다고 칭찬해주었던 백만스물한번의 예쁜 말들을 유기견이라는   음절의 짧은 단어가 

단숨에 이긴다.




(그놈의)

유기견과 벌써 햇수로는 4년차가 되었고,

이미

이 아이를 내가 그때 데려오지 않았으면...
이 아이는 그간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


 따위의 감상은 해묵은 것이 된지 오래가 되어 버렸다.

이 강아지와 같은 종의 아가 강아지 사진을 하도 여러 번 보고

우리 강아지도 어렸을 때 이랬을 것 같다고 매번 자주 상상해서

이제는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이미 같이 지내왔던  같은 착각에도 쉬이 빠진다.


 당장, 이번주에 비가 오면 산책을 

어떻게 시킬지가  관건이고

캠핑이라도 계획한다 치면

캠핑장이 강아지 동반이 되는지 안되는지의 여부가

훨씬 현실적으로 내게 중요하다.


 사실, 입양하고 난 직후

강아지는 심각한 피부 질환이 있었고,

그 때문에 병원에서 알러지 요인을 찾아야 해서

사람 아기 이유식처럼 하나씩 먹여보며 반응을

살펴야한다고 하셨다. 게다가 설사병에도 걸렸었다.

양심적이고 친절한 동물병원에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족히 삼십만원 정도는 지출했고

이미 데려오면서부터 이십만원이 넘는 비용이

나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추한 인간인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미지 출처: https://kr.123rf.com/photo_19139912_%EA%B3%84%EC%82%B0%EA%B8%B0%EC%99%80-%EC%86%90.html


약값과 각종 예방접종을 맞추러 다니면서는

괜히 데려왔나 싶기도 하고,

일주일 정도는 아이가 우리 집에 적응하느라고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바람에

나도, 강아지도 잠을 못 잤다.









그 뿐인가,

쓰레기통을 하도 뒤져서 우리집의 모든 쓰레기통은

선반 위에 올려놓는 것이 기본값이 되었으며

더 솔직하게는,

설사를 일주일 넘게 지속했고

약을 먹여도 설사가 멈추지도,

열이 떨어지지도 않아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고치기 힘들어도  어쩔  없겠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막 이리저리 병을 고치기 위해 돌아다니지 않고

몇 군데만 더 가보고

고쳐지지 않는 병이면

아주 큰 돈을 들여서까지는

내 수준에서 못할거라고 생각하고

몇 주가 더 지났다.


신기하게도

차츰 강아지는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내가 집 안에서 어디를 가든

졸졸졸졸

정말 미친듯이

졸졸졸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강아지와 함께 하루를 하다보니

이제 강아지의 고소한 냄새에 중독되기 시작했고

자기 전에 강아지의

고소한 아몬드 바닐라 발 냄새,

짭짤한 미역국같은 눈 냄새,

솔티 한방울 머금은 귀 냄새,

그리고

강아지 머리에서 가끔 나는 내 핸드크림 냄새와

바디크림 냄새.



그리고 깊이 잘 때

간혹 보여주는 분홍색 배까지


그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구석이 없을 정도로

이 동물은 내 삶에 깊숙히 녹아있다.


그러면서 이 '유기견 발언' 이 아쉬운 이유는

큰 마음가짐을 먹고 유기견 입양을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그 아름답고 귀중한 용기를

한 풀 꺾이게 만드는

발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신중하게 입양을 결정하는 것이

물론 가장 중요하지만

강아지와 함께 지내면서

나와 같은 인간종이 아니지만

나보다 물리적으로 훨씬 조그만 생명이

얼마나 나를 믿고 의지하며,

날카로운 발톱과 아주 힘이  턱과 

치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 불편하면 낑낑대거나

자리를 피하는 것으로만 대신하며,

하얗디 못해 분홍빛의 연한 배를 연신 보이며 

애교를 부리고,

자기 전에는 꼭 본인의 뜨끈한 엉덩이와 등을 대고

우리가 가족임을,

오늘 하루도 큰 이벤트 없이 잘 보내왔다고

일깨워주는 생명임을,

안녕, 잘자라는 말 한마디 없어도

눈빛과 온기와 냄새와 행동으로

온전히 전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을

  두텁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가 하나 

 생기는 경험을 많은 사람들이 했으면 

좋겠는 바람이 있다.



유기견이라고 딱히 크게 다르지 않다.

상처를 받아서 사람을 무서워한다거나,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집착한다거나,

이런 카더라 통신은 잘 모르겠고,


가끔씩 우리 강아지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커서 그런지

다소 버릇이 없고


심지어는 우리 가족이 없어도

그 어느 곳에 가도

너무 잘 살 것처럼

명랑해서 문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유기견은 유기체가 아니므로

성격과 성향이 다 다르다.

유기견이라고 해서 상처가 더 많을까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어미와 강제로 떨어져

가정으로 입양되기 전 까지는

유리창에서 보는 인생이 전부인

펫샵에서 팔리는 강아지가 더 상처가 많을까




분명한 사실은

유기견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유기견이라는 단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거다.




유기견이었던 강아지를 기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유기견을 데려와  가족처럼 보살펴주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고,

이에 방해되는 어떤 유명인의 발언이나

방송매체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영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내가 유기견부심을 조금이나마 부림으로써

유기견들이 각각 새로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궁극적으로는 조금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깊게 든다.


이 글을 끝으로

유기견이라는 말을 들을 일도

쓸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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