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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혜경 Feb 12. 2022

오늘 저녁, 나는 수제비를 끓였다

<작가 구혜경의 일상에세이> #5

수제비를 끓였다. 육수를 끓이고, 채소를 넣고, 미리 반죽이 된 밀가루를 씹기 좋은 크기로 손으로 떼어 넣는다. 매콤하게 먹고 싶어 청양고추도 썰어 넣었다.


몇 달 동안 마음을 쓰던 일이 일단락되었다. 나는 그 몇 달간 이유 모를 불면을 앓았고, 병원에 가서야 내 마음이 힘든 걸 알았다. 너무 둔해서, 혹은 그래야만 해서 나조차 내 마음을 몰라주었다. 내가 나를 외롭게 했다.


그렇게 나를 오래 괴롭힌 일이 일단락된 게 어제. 그리고 오늘 저녁 수제비를 끓였다.


편히 쉴 수 있는 날을 하루 남겨둔 주말. 조용한 주변. 곤히 잠든 이의 숨소리와 기척. 내 눈이 닿는 곳에 똬리를 튼 강아지. 오래 보지 못해 보고 싶은 친구들과 비로소 잡은 약속. 그날 뭐할까, 오가는 즐거운 대화. 보글보글 끓는 소리.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충만감을 느꼈다. 앞으로 내게 쥐어질 것들을 생각했다. 평화로웠다. 행복했다.


결국 또, 언제나 그랬듯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정말 운이 좋구나. 매일 되뇌던 말처럼 `운빨 인생` 어디 가질 않는구나.


괴로웠던 나, 그럼에도 운이 좋아 행복에 도달한 나를 위해 수제비를 먹는다. 뜨겁게 끓다 마침내 사람의 체온을 닮은 음식이 또 다른 위로가 된다.


ⓒ구혜경, 20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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