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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20. 2024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단절을 환대해보기로

전혀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마치 연기를 하는 것 같이 사는 날들이였다.  

집을 나설 때면, 끝없이 가라앉았던 목소리를 애써

한 톤 끌어올리고  무표정한 얼굴을 조금 밝게 바꾼 뒤,누군가가 건네오는 인사를 반가운 듯 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톤과 표정으로 상대를

만나거나 전화를 받았다간  반드시 되돌아오는 질문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왜 그렇게 지쳐 보여?’ 였다.


그때마다 난  

“힘 많은데?”  

금세 분위기를 바꾸는 농담을 던지거나,  

혹은 힘이 없는 이유를 몇 가지 설명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어쩌라고?  

힘이 없을 만큼 힘든가 보다 생각하면 될 것이지...’  


걱정해주는 마음조차 귀찮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질문을 받은 지 꽤 오래였으니까.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나는 이토록 ‘텐션’이 낮은

사람은 아니였던 듯 하다.  

초중고 시절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종종 활달했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는 학업 스트레스가 사라진 덕인지  

원래의 유머러스한 내 기질이 십분 발휘되었고,  

방송작가를 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사교적이고

유쾌한 편이였다.  


봄에 한창 꽃이 필 때나, 단풍이 질 때처럼  

새로운 계절이 오고 가는 것에 설레었고,  

첫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거나 졸업하는 등  

의미있는 삶의 시간을 지날 때마다  

‘사는 게 문득문득 행복하구나’ 라며

한껏 감정이 솟구칠 때도 있었다.  


별 특별할 것 없는 일상에서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주제로 이야기를 하거나,  

국내든 해외든 여행이라도 가게 되는 때는  

그야말로 흥에 겨워 파이팅이 넘치는 날을

살기도 했다.  


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분명 그런 날들을 곳곳에

심어가며 지루하고 고달픈 날들조차 생기있게 지내고

있었다.  


그랬던 내가 언제부터였을까?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 한 입꼬리 하나 올리고

싶지 않아졌고,  

기분이 처지는 날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먼 하늘을 보며 걷기도 했고,  

으레 관심 없는 안부를 묻는 거부터 시작해  

온갖 정보 교환을 해야 하는 모임엔 나가고 싶지가

않아졌다.  


아이들 학원 이야기로 시작해 남편의 음식 취향,

시댁 이야기까지 쏟아지는  엄마들과의 수다는 더이상 스트레스 해소가 아니라 기가 다 소진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특별히 감정을 실지 않아도 되는  

회사 업무 이야기가 휠씬 더 편안했고,  

때로는 택시 아저씨와의 날씨 이야기가 더 수월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예전엔 소소한 행복이었던 그 모든 순간들을  

그렇게 의미없는 일들로 매도하면서,  

정작 가장 씁쓸해지는 건 사실 나였다.  

아마 ‘왜 이렇게 힘이 없냐’는 말에 발끈

화가 나는 것도  그런 속마음을 정확하게 들켰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가만히 지난 시간들을 되짚어보면 지친 건 사실이였다

일단 육아에 어떠한 정서적, 실질적 도움도 받을 수 없을만큼 나는 친정과 먼 거리로 떠나왔다.  


매일 엄마와 언니와 전화를 하면서도 그저 서로 안타까워할 뿐  어떤 지원도 얻지 못한 채 그저 버텼다.  

정시 출퇴근 하는 회사를 다니면서 육아하는 것도

버거울텐데,  예측불허한 방송일을 하면서 두 아들을 키우는 일은 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그 사이사이, 작가로서 평가에도 늘 신경이 곤두서있었고,  빈손으로 시작해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는 삶이란  너무나 멀게만 느껴져 자주 맥이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은 대한민국에서 직장 다니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 여겼기에 크게 버거움을 느끼지 않았고,  또 함께

푸념할 이들이 옆에 있어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 왔다.  

워킹맘과 하우스 푸어의 비애를 유머로 승화시켜가며.  


진짜 지친 건 아마 아이들의 혹독한 사춘기 무렵이었을 거다.  

내가 맞다고 믿었던 것들, 그래서 열심을 다했던 일들,  

그것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로 올 때의 허망함은 생각보다 여파가 크고 길었다.  

아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게 먼저였고,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일과를 쪼갰고,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공부를 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대화로 조율하며 아이들을 키워왔다 자부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으로 사춘기를 잘 대비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마치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보란 듯이 감당 불가 수준이였다.  


더 이상 엄마를 온 우주의 전부인 양 애정의 눈으로

본다거나  살갑게 대답을 하는 아이는 사라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사춘기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걸 감수하기도 힘들 건만 아이들의 성적은 바닥을 쳤고,  나는 담임과 자주 전화를 했고, 종종 학교에서 호출이 왔으며,  내가 평소 생각해왔던 소위 ‘후레자식’의 전형을 매일 시전하며 나를 기함시켰다.  

매일 충격과 허무함, 다시 진정을 반복해야 했던 날들.  

그 마음의 요동을 감당하느라 아마 기가 다 빨려가고 있었다.  

그간 누적된 육체적 피로 끝에 온 마지막 심적 펀치는 나를 넉다운시켜 버렸다.  


기억컨대, 열심히 살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던 듯 하다.  

물론 그 열심의 결과 덕에 먹고 사는 일에 허덕이지 않아도 됐고,  경력도 단절되지 않았으며 나이에 걸맞게 성공한 듯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엄마로서, 한 인간으로서 내 자존감은  반대 방향으로 바닥을 치고 있었다.  

이젠 끌어올릴 기운이 없어 ‘연기하듯’이라도 살 수 없을 거 같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졌다.  


<나는 자연인이다> 원고에 ‘꾸역꾸역’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기 시작했다.  

마치 내 심정을 그들에게 투영시켜서 쓴 듯한 원고였지 싶다. 더이상의 ‘꾸역꾸역’은 못하겠다 결심할 무렵, 코로나가 왔다.  


그리고 나는…

나에 대해 깊이, 오래 오래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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