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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22. 2024

엄마가 해서는 안되는 일

나는 이미 이 이야기의 끝자락에 서 있다.

그럼에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난 석 달간의 시간을 아침마다 복기하고 있다.

자꾸만 망각에 빠지는 나를 현실로 데려오기 위해...  

    



재작년 3월. 코로나로 군항제가 열리진 않았지만

봄비를 피한 벚꽃은 여느 해보다 흐드러지게 만발하며도시 전체에 꽃길을 깔았다.

엄마 집은 유명한 벚꽃 명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해마다 관광객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며

나가길 꺼리는 우리였지만

재작년만큼은 진해 토박이도 반할 벚꽃이었다.

결국 온 친정 식구가 출동해 어설픈 인스타각을

잡으며 벚꽃에 파묻혔고,

해마다 여의도 벚꽃으로 만족해야 했던 나는 모처럼 진해 벚꽃에 흠뻑 취했다.


아이들이 크니 우리 4남매는 모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툭하면 가족 단톡에 벙개를 공지하며 김포, 부산, 진해에서 ‘헤쳐모여’하는 재미에 빠졌고,

엄마는 이 대책없는 벙개를 타박하면서도 내심 누구보다 신나 했다.

어버이날엔 다같이 바다가 보이는 카페 투어를 다녔고

여름에는 느닷없이 오빠가 지리산 산자락 식당 하나를올리자, 다들 ‘고마해라...’며 불평을 해대더니,

그날, 그 시각에 언제 그랬냐는 듯 속속 모였다.

4남매는 오십이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아이가 되는 듯했다.

어릴 적 에피소드를 수 십번도 넘게 반복하면서

매번 똑같은 포인트에, 똑같이 자지러졌고,

똑같이 타임머신을 탔다.

그리고는 10월 엄마 생신 여행은 어디로 갈지

고민하자며 웃으며 헤어졌었다.     

 



얼마 뒤 다가온 엄마의 생신 전날,

엄마는 국립암센터에서 간담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복막 전이가 심해 치료 단계는 이미 넘어섰고

여생은 길어야 3개월에서 5개월이라 했다.

갑자기 배가 답답해 호흡이 곤란하다며 입원한 지

불과 한 달만이었다.

병명을 찾기 위해 큰 병원으로 옮겨가며 심란하긴

했지만,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결과였다.


‘몇 달 전 벚꽃 아래서 사진도 찍었고

지지난달에는 지리산에 휴가도 갔는데?

말기암이라고? 3개월밖에 못 산다고?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한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임박해서

통보해도 되는 걸까?

아무리 사람의 목숨이 하늘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가혹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잔인해도 되는 건가...?     


비통함과 충격에 휩싸인 우리를 향해,

암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토록 멀쩡하던 엄마는 먹는 족족 토하기 시작했고, 진통제도 하루가 다르게 양이 늘어났다.

한 달만에 10키로나 빠지는 엄마를 보니, 의사가 말한 3개월은 맞는 말 같았다.

믿어야 한다는 사실에 더 숨죽여 울었다.

엄마의 갑작스런 섬망증세까지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총기가 남달랐던 엄마가 헛소리를 해댔고, 장소도,

계절도, 자신의 병도 인지하지 못했다.

나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고 묻던 날,

나는 신호대기 중인 앞차를 들이박는 사고를 냈다.


결국 언니와 나는 호스피스 병원 1인실에서

엄마와 24시간을 함께 지내기로 했다.

보호자 1인만 상주해야 하는 엄격한 원칙을 깨고

밤마다 숨어들어와 침대 옆에 쪼그리고 자던 나를

수간호사가 눈감아 준 덕이었다.

엄마의 의식은 급속도로 허물어졌다.

섬망마저 사라지고 초점 없이 멍한 눈만 뜨고 있을 뿐 아무런 의사 표현도 하지 못하게 된 엄마.

그런 엄마의 귀에 대고 언니와 나는

‘오늘은 월드컵 경기가 있다, 식당 밥이 별로다,

어느 간호사는 불친절하다,

재벌집 막내아들 드라마가 재밌다는 둥’,

쉴 새 없이 웃고 떠들어댔다.


‘키워줘서 고맙고, 편히 쉬고 또 만나자’는 말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하지 않았다.

그 인사가 수다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일주일, 마치 의학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엄마 몸에 주렁주렁 달린 모든 기계의 수치는 ‘0’이

되었다.

의사가 말한 3개월보다 훨씬 빨리, 그렇게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났다.

말기암 판정 후 겨우 두 달.

엄마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엄마를 홀로 차가운 영안실에 두고 발이 떨어지지

않는 우리에겐 우는 일 말고도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복의 사이즈를 정하고, 영정사진을 고르고,

장례식장 음식을 고르고, 유골함을 선택하는 일 등...

‘상복 사이즈를 고르라니?

그 상복의 사이즈를 고민하고 있는 나라니...’

어른의 세계는 참 아프고도 매정했다.


아버지는 해군본부에서 오랜 군무원 생활을 하셨고,

오빠도 언니도 진해 토박이였기에 첫날부터 조문객이 줄을 섰다.

동생과 나의 지인들도 멀리서 달려와 주었다.

화환이 넘쳐나 입구까지 길을 만들었고,

새벽이고 밤이고 조문객은 끊이질 않았다.

우리는 오열을 하기도 했고,

누군가를 반가워하기도 했고,

옛이야기를 하며 눈물 바람을 하기도 했다.

흡사 그 공간은 어떤 잔치 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잔치 어딘가엔 엄마도 엄마의 지인들을

맞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에 멍하니 있다 무방비상태로 마주하는

엄마의 영정사진은

매몰차게 나를 흔들어 깨웠다.     




매일 아침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더듬어

폰을 찾는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그리운 내 엄마’ 폴더로 들어간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는 엄마, 요가를 배웠다며 시범을 보이는 엄마,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는 엄마, 어버이날 감사패를

받으며 우는 엄마...

모든 것이 화면 그대로 너무나 생생하다.

그런 엄마를 보며 어느 날은 오열을, 어느 날은 끝없이 가라앉은 하루를 시작한다.

‘엄마가 진짜 없는 게... 맞나?’


아침부터 대성통곡을 하던 날, 20년 전 엄마를 보낸

동창 Y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를 보내고 지인들의 전화를 잘 받지 않았다.

이 거대한 슬픔을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틀렸다고 해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Y는 예외였다.


“또 우나? 출근해야지.”

우느라 대답도 못하는 내게 Y가 그랬다.

“내가 언젠가부터 든 생각인데,

엄마는 자식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되는 거 같다”

울다가도 의아했다.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가는 건 순리 아닌가?’

말없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가 살다가 힘들 때마다 엄마를 찾잖아.

그럼 엄마가 다 해결을 해주잖아.

해결을 못 해 줄 때도 부르면 어디서든지 달려오잖아.

전화하면 언제든지 받잖아.

그게 엄마잖아?

근데 엄마가 죽는 일은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인데,

자식이 이렇게 괴로운 일에 빠져 있는데

엄마가 안 오잖아...”

   



이 세상에 나오기 전 나와 탯줄로 연결되어 있었던

존재,

그 생명의 근원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는 건,

내게 있어 단순히 한 가족의 죽음이 아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적으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었을, 어쩌면 나보다 더 내 편이었을 우주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뚜렷하게 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고,

가늠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거대한 지진을

맨몸으로 견디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후의 나를 설명할 수가 없다.

휘몰아친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던 나는

폭풍이 지나간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으로

어떻게 발을 내디뎌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목놓아 엄마를 부르며 울어도 대답이 없으니

친구의 말이 맞다고 억지를 쓰고 싶다.

엄마는 내게,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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