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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17. 2024

다시 나를 만날 수가 있다면

풍요로움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살아볼 것


“엄마, 나 기타학원 다닐래요”

“엄마, 파마하면 안되요?”

“콘택트렌즈 사야 되요”

“기숙사 말고 자취할래요”    

  

내내 입 붙이고 있던 놈들이 겨우 입을 떼기만 하면 다 돈 들어가는 소리다.

형편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어쩐지 불편한 마음부터 올라온다.

'그래, 생각해보자'

'그래? 벌써 사야 돼?'

작정하고 한 호흡 쉬고 대답을 해보지만 내심은 '공부는 지지리도 안 하면서 참 요구 사항도 많다'라는 맘이 먼저다.

얼마 전엔 기말고사를 끝내주게 망치고 온 둘째가

'엄마, 여름 티 사주세요'라길래

'내가 시험 못 친 거에 대해 아무 말도 안하고 있는데 어떻게 뻔뻔하게 옷을 사달라고 하냐?'며

속마음을 여과 없이 뱉어버렸다.    

  

"엄마, 시험 못 친 건 위로받을 일이지,

혼날 일은 아니죠,

그리고 엄마가 자꾸 돈 아깝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요,

원래 자식을 낳으면 이 정도 돈은 써야 돼요".      


당당하다 못해 뻔뻔스러운 대답에 기가 차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이놈들의 뻔뻔함, 그 십 분의 일만 있었어도 좋았을

나의 어떤 날들이 떠오르며...   




대학 4학년, TBS대구방송 작가 채용에서 떨어지고, 서울에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방송작가가 되려면 서울이 나을 것이고,

다행히 막내 고모가 서울에 살고 있었다.

홀로 상경하던 날, 지방에 살다 처음 타본

서울 지하철은 복잡하고, 어렵고, 무섭기까지 했다.

'눈 뜨고 코 베가는 서울'이라는 말을 닳도록 들어왔고, 1호선엔 노숙자도, 구걸하는 사람도 많았다.

인파에 떠밀리듯 승강장을 걷고, 지하철을 타며

두리번거리지 않으려 애썼지만,

커다란 캐리어를 놓칠세라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나는 누가 봐도 촌뜨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공릉동 작은 연립에서 고모 식구들과 함께하는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3교대 근무를 하시던 고모부는 낮에 집에 계시는 때가 많았고,

종종 고모 이웃도 놀러 왔기에 나는 종일 나가 있었다.

아마 더부살이 눈치는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받는 거였지 싶다.      

아침 일찍 1호선을 타고 종로에 있는 영어학원을

갔다가 탑골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종로3가역 버거킹에 앉아 종일 시간을 보내는 게 나의 일과.

지금의 카공족처럼 버거킹 창가엔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 역시 혹여라도 작가가 되지 못한다면 토익 점수라도 있어야 취직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가장 저렴하게, 정기적으로 어딘가를 갈 수 있는 게

영어학원이었다.

이력서를 쓰고, 전화를 기다리고, 또 영어학원을 가고, 햄버거를 먹으며 종일 버거킹에 앉아있는 것.

종로 탑골공원 할아버지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일과를 보낸 지, 한 달쯤 됐을까?


케이블 TV방송을 하는 제작사에 취직이 됐다.

드디어 엄마에게 얼굴도 서고, 내 돈으로 방도 얻을

꿈에 부풀었다.

무엇보다 내 이름 뒤에 작가가 붙는 게 꿈만 같아

지하철에 앉을 때면 내 이름 뒤에 작가가 적힌 파일을 일부러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랬던 첫 직장을, 채 두 달도 못 다녔다.

재정 상황이 어려워졌다며 작가들 월급을 미뤘고,

메인 작가 언니들은 대표가 상습적이라며 고소를

한다고 나에게도 도장을 가져오랬다.

23년 인생 처음, 부당함과 싸우는 고달픔,

녹록지 않은 어른들의 세상을 맛봤다.

그날, 신대방삼거리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며 느낀

한여름의 숨 막히는 땅의 열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뜨겁다.

지하철, 종로, 여의도, 카페...

서울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선망의 단어들은

석 달도 되지 않아 서글프고 쓰라린 경험들로

채워졌다.    

  

두 달치 월급을 떼이며 들은 이야기로

MBC, KBS, SBS아카데미 같은 교육 기관이나

<한국방송작가협회>에서 구성작가 과정을 들으면

나름 괜찮은 제작사나 방송사로 취업하기가

쉽다고 했다.

방송사 이름이 붙은 아카데미는 당시에도 200만원

정도 돈을 내야 했고,

한국방송작가협회는 60만원 정도만 있으면 다닐 수 있다고 했다.

200만원은 집에 말을 꺼낼 엄두도 못 내겠고,

60만원 정도는 엄마에게 말해볼까 싶었다.

취직이 보장만 된다면 그깟 60만원을 안 해줄 엄마도 아니었고, 그만한 돈이 없는 집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말이 도무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무렵 엄마 계모임엔 내 또래와 비슷한 자식들이

하나, 둘 번듯한 회사에 취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간간이 시험지 채점, 방송 프리뷰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돈이 부족해 대학 졸업을 하고도 엄마에게 용돈을

받고 있던 터라 아무리 생각해도 염치가 없었다.

60이 아니라 6만원을 받기도 미안했다.

혼자 서울에 보내놓고 매일 걱정스런 전화를 하는

엄마에게 며칠째 ‘지낼만 하다’는 말만 하고는

말을 꺼내볼까 머뭇거리다 끊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그 날도 버거킹에서 시간을 보내고 석계역으로 가는 길이였다.

지하철 문 앞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가고 있는데

갑자기 지하철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다 내리는 게

아닌가? 나만 당황할 뿐 누구도 요동함은 없었다.

영문을 모른 채 떠밀려 내린 나는 가장 친절할 거 같은 아주머니께 용기 내 물었다.   

   

"왜 지하철이 안가나요?" 내 물음에 친절은 커녕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청량리잖아요!" 차갑게 쏘아붙이고는

쌩하니 가버렸다.

‘청량리랑 지하철이 안가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

당황해 한참을 두리번거리고서야 나는 청량리행

열차가 청량리까지만 간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어찌 알았겠나. 청량리역이랑 석계역은

같은 방향이라는 것만 알았지...


무안함을 들킬새라 아무렇지 않게 다음 열차를 타고, 자리까지 한 칸 차지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더니, 주체할 수 없이

내가 흐느끼는 게 아닌가.

'이게 무슨 창피야' 싶으면서도 눈물은 멈추질 않았고

아무리 삼키려 해도 엉엉 소리까지 새어나가고 있었다.

옆에 앉은 여자가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나보다 더 놀랐을까?

아무리 소리를 죽이려 애를 써도 말을 듣지 않았다.

도무지 막을 수가 없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결국 그런 채로 거의 석계역까지 간 듯하다.

누군가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나라고 생각했을지도...

      

그토록 뜨겁게, 토해내듯 울고 난 뒤에도 결국 나는

60만원짜리 동아줄을 잡지는 않았다.

그 동아줄이 없어서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방송작가로 자리를 잡기까지

꽤 고단하고 사나운 날들도 견뎌야 했었다.  

   


살면서 종종 그날의 내가 생각이 났다.

지하철 한 귀퉁이에 앉아 펑펑 울고 있었던 스물 셋의 내가...

꾹꾹 눌러 참은 서울살이, 더부살이의

서러움이었을까?

부모, 형제를 떠나 와 고아처럼

홀로 내던져진 기분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짊어진 어른의 무게가 두려웠던 걸까?

그 눈물의 의미는 여전히 뿌옇다.

하지만 그때 모습만큼은 너무나 선명하고, 잔상은

이십년이 넘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떻게 진짜 어른이 되는가>라는 책에 보면

우리가 어린 시절 경험했어야 하는 것 중 하나로

‘풍족함을 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는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욕구가 충족돼야 건강하게 자기표현을 할 줄 아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self 양육‘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당연하게 누려온 무언가'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

기억이라는 것이 선택적으로 남아있기도, 사라지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내가 ’당연하다‘는 태도로 무언가를 누린 기억이 특별히 나질 않았다.  

무언가를 누리긴 했겠으나... 내 태도의 모양새는

그러하지 않았지 싶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지난날의 결핍을 몰빵(?)이라도

하듯 돈이나 시간, 무언가를 과용할 때 이 책의 내용을 슬쩍 내 합리화의 도구로 쓰고 있다.

’이 정도 풍족함은 누리는 게 당연해‘라며.

그 내용과 나의 행동이 일치되는 것인지는

일부러 따져 묻지 않은 채,

내 편한대로 해석하고 있는 셈인데

그 쾌감이 어쩐지 나쁘지가 않다.      


종종 과거 어느 때로 돌아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거나

하고 싶은 말을 전해주는 드라마들을 볼 때면

어김없이 그날이 떠오른다.

그리곤 200만원을 들고 종로3가역 버거킹으로

찾아가는 상상을 해본다.  

200만원을 건네며 걱정말고 배우고 싶은 곳에

등록하라고.

종로 버거킹에서 바라본 서울보다 더 넓은 서울의

이곳저곳을 경험해보라고.

지금은 ‘풍족함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때’라고.


그렇게 따듯하게 등 한 번 두드려주고 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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