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작가 Sep 15. 2024

It’s none of my business

이토록 가혹한 문장


So what? It’s none of my business!

 

정현, 미정, 경미(가명), 오십을 갓 넘긴 여자 셋과 나,

우리는 한때 모기업의 사내방송을 주름잡던 작가들이다.

영향력을 단언할 순 없으나 넷이서 10년 가까이 일을 했으니 주름잡았다는 말이 가히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 간 다양한 계열사에서 인간군상을 감내하며 버텨낸 동지애로 뭉친 우린 1년에 한 번씩 회포를 푼다

.     

“K 팀장이 가장 애정한 작가, 오랜만에 막내가 쏘는 밥 한번 먹자!”

“그럴까? 돈도 제일 많이 벌었잖아”

농담으로 건넨 말인 줄 알고는 있으나 생각이 많아지는 이름이다.     


K는 기업 합병으로 모기업의 일원이 된 사람으로 그들이 말하는 소위 ‘정통파’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계열사 홍보팀을 거쳐, 총괄 홍보팀까지 치고 올라온 야심가이자 지독한 워커홀릭에 왕따를 자처하며 관계보다는 승진에 온 인생을 건 사람이였다.

그 때문에 평판은 최악이었으나 홍보담당자로 업무 평가는 최상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작가나 피디는 라인업에서 빼달라고 제작사 사장에게 압력을 넣는 일도 다반사였기에

그에게서 살아남는다는 건 은근 자부심이기도 했고, 실제로 다른 일보다 페이를 더 요구할 명분이

되기도 했다.      


가장 선배였던 정현작가는 어느 날, '편당 천만원을 준다 해도 K와는 일을 하지 않겠다’ 선언했고,

 미정 작가는 K쪽에서 원고스타일이 마음에 안 든다며 제작사 사장에게 말을 넣었다.

경미 작가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일도 잘해 K가 좋아했던 작가였다.

언젠가 ‘CEO 프로그램'을 할 때, K의 무리한 일정요구에 화가 난 언니가 불같은 성격 그대로

‘겁도 없이’ 그를 들이 받아버리기 전까진.      


나만 혼자 남았다.

하필 연중 그의 ‘생리’가 가장 심한 대규모 프로젝트들을 앞두고.

하지만 묘하게도 그 두려움은 선배들을 제치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으로 스멀스멀 차올랐고

혼자 그를 감당해야 하는 위로금으로 사장님은 작가료를 소폭 올려주었다.


그리고 왕따를 자처한 그의 일중독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기에 종종 나는 그에게 연민도 느꼈었다.  

‘감히’ 그를 동정하며 나는, K가 정통파 사이에서 승승장구하도록 도왔고 내 입지도 다지기 위해 열심히

중요 홍보물을 준비해나갔다. 보지 않아도 되는 각종 레퍼런스 영상을 찾아가며 아이디어를 냈고

그도 나의 실력과 열심을 인정하는 듯 회의 때 마다 만족해했다.


그러던 중, 다음 회의 때까지 수정된 기획안을 달라는 그의 말에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어 하루 늦겠다는 말을 전했다. 웬만해선 일정 변경을 하지 않는 내가 큰 맘먹고 한 말이었고 입학식은 중요한 일이고,

또 그와 나 사이에 그 정도의 신뢰는 형성됐다고 생각했기에.      


나를 빤히 보던 그의 답은

“So what?, It’s none of my business!”

잠시 정적이 흘렀다.

뜬금없는 영어에 뭐라고 대응해야 할지…

무엇보다 정확히 선을 긋는 그에게 나의 착각이 무안했다.

그럼 그렇지...신뢰는 무슨...’     


기획안이 통과되고, 이제 원고를 쓰는 단계,

둘째 아이가 장염에 걸렸다.

재택근무를 하기로 하고 병원에 다녀오던 길, 안고 있던 아이를 현관 앞에 내려놓는 순간 K에게 전화가 왔다1차 원고 피드백을 받기로 한 날이었다.


그는 작가들이 아이 핑계 대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통화 중에 아이 우는 소리에 짜증을 내는 K와 경미 작가는 ‘한 판 붙을 뻔’도 했었다.

순간 아이를 중문 안으로 들여놓고 현관문은 열어놓은 채 복도 저쪽 끝으로 뛰어나갔다.

난데없이 엄마에게서 버려진 아이가 울기 시작했고 복도 반대편이었지만 아이의 발악에 가까운 울음소리는 수화기를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애가 우는 건가?”

“아닙니다. 길거리에요. 지나가는 아이예요”      


졸지에 지나가는 아이가 된 둘째는 겁에 질려 엄마를 부르며 울어댔고 나는 복도 끝에서 10여 분 통화 끝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거실 끝에서 꼼짝 않고 선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그는 최종 원고가 나올 때면 더욱 예민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위로 사장단까지 몇 장 되지도 않는원고를 씹어 먹을 듯 검토를 해댄다. 그러니 나에게 수시로 전화를 했고 시시콜콜 한 것까지 수정을 요구하며 짜증의 강도를 높였다.  

    

내일은 아이가 덜 회복되더라도 꼭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 결심하며 아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원고를 쓰는 것도 아니던 오후, 그가 또 전화를 했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보며 방으로 들어가서 전화를 받을지, 베란다로 나갈지 우왕좌왕하다

서둘러 통화버튼을 누르고 베란다 문을 닫았다.

거실과 베란다 사이 문은 유리문이라 엄마가 보이면 아이가 안심할테니까.


분명 나는 내가 베란다로 나가서

문을 닫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베란다에 서 있는 건 둘째였다.

겨울이었고, 아이는 맨발이었다.

느닷없이 베란다 밖으로 자기를 밀어버린 엄마를 보며놀람과 서러움에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다.

서로 자리를 바꾸기엔 늦었다.


그는 이미 일일이 워딩 하나하나 따져가며 수정을 하기 시작했고,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받아 적어야 했다. 너무 울어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아이의 얼굴을

유리문 사이에 두고 울지 말라는 절절함을 담은 얼굴을 보여줘가며...

애타는 마음만큼 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길고 길었던 전화가 끝나고 베란다 감옥에서 나온

아이의 울음은 쉬이 그치질 않았다.

얼음장이 된 작은 발을 내복 속 나의 배 위에 넣어

데우며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가슴 졸인 내가 너무 안쓰러워 나도 한참을 울었다.

아이의 서러움에 내 서글픔까지 포개져

아이의 발에도 내 마음에도 온기는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잠시만요, 제가 좀 있다 전화드릴께요”

“죄송합니다. 지금 전화 받을 상황이 못 돼서요”.     

 

이 당연한 말이 나는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도대체 나는 뭐가 겁이 났던 걸까?

나는 왜 부당함에도 순응하고 웬만하면 내가 불편한 쪽을 선택하며 살았을까?


나이가 들수록 더 자주, 지나간 어떤 날들,

어떤 사건들, 또 그 속의 나를 반추할 때가 있다.

대체로 쩔쩔매고 있는 나를.


‘인생의 모든 사건과 순간은 영혼에 씨앗을 심는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숱한 씨앗들이 마음과 의지에 내려앉아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고.


요즘 나는 나의 안녕에 반하는 것들에 적극 대항하는 투사라도 된 듯 민감한 삶을 살고 있다.

투사보다는 ‘느긋한 지킴이’ 정도가 좋긴 하겠으나,

그 간의 억울함 때문인지 아직은 힘이 빠지질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안녕할 수 있는 선을 넘는 이들에게

다소 저돌적인 자세로 용기 내어 말하는 중이다.

 

“I’m Sorry but It’s none of my busines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