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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Sep 10. 2024

비밀의 섬, 소록도에 갔습니다

생계형 작가의 외도

전남 고흥반도 끝자락, 살면서 한 번 들어본 적 없었던 녹동항에 내렸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을 식당에 대느라 정신없는 뱃사람들,

연신 귀에 꽂히는 요란한 사투리 호객을 피해 겨우 약속장소로 들어섰다.      


“작가님 여기가 녹동항 핫플인데요...”

“어? 피디님, 카메라 감독님이 바뀌었네요?”

뒤따라 도착한 카메라 감독은 서울서 미팅할 때 봤던 그분이 아니었다.  

“아... 그게 아무리 전염이 안된다고 설명을 해도... 영 맘에 걸리신다고...”   

  


녹동항에서 불과 500미터, 손에 닿을 듯한 거리에 쉬이 허락되지 않는 섬, 소록도가 있다.

어릴 적 말로만 듣던 ‘문둥병’, ‘나병’, 정식 명칭으로 ‘한센병’은 전염력이 상당히 희박하고 완치도 가능해

현재 이 병이 진행 중인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단다.

그럼에도 ‘한센병’에 대한 선입견은 공포에 가깝다.

나 역시 오늘 출장을 앞두고 어젯밤 가위에 눌리기까지 했으며,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만나면 덜 무섭지 않을까?’라는 기이한 생각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 카메라 감독은 어린 자녀가 있어서 이 다큐가 꺼려진다는 이야길 첫 회의 때부터 했었다.

‘나도 엄만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K피디는 ‘소록도 기록의 필요성과 주인공 한센병 환자 몇 분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명문대 출신인 그녀는 메이저 방송사에 입사하는 대신 직접 ‘착한 다큐’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가지고 독립영화도 한 편 만든,

의롭고 바른 청년이자 인류애가 넘치는 30대 여자 피디다.

굳이 비교하자면 ’예술하는 것도 아니고, 작가료가 좀 적어도 품은 덜 들고,

애들 키우기에 무리없는 선에서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자‘는 작가인 나와는 직업의식의 결이 좀 달랐다.


언젠가 잘 알고 지내던 피디가 나에게 터무니없는 열정을 요구하는 프로그램을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K피디를 처음 알았고, 나는 그 판이 열정이라는 미명하에 ‘뽕을 뽑겠구나’를 직감했고,

바쁘다는 핑계로 그 판에서 무사히 발을 뺐다.

당시 나와 파트너가 될 뻔한 그녀에게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프로그램을 하자’며

급조한 변명을 하고 헤어졌었다.

그리고 얼마 뒤, ‘같이 일을 하자’며 연락이 온 것.

‘미안해도 헛공약은 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했지만,

후회는 이미 시퍼런 바다 위 소록대교를 넘고 있었다.   

   


소록도의 일부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된다.

입구의 바닷가, 국립 소록도 병원, 기념품 가게, 거기까지다.

우리는 취재를 위해 국립소록도병원 원장 허락하에 통제구역 안까지 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소록도에 살고 있는 분들의 집에 가는 것이다.      


“전에 공연을 왔던 가수는 통제구역 안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진다며 주저앉아 버렸데요.”

“펑펑 우는 사람도 있고요.”


병들고 버려졌던 사람들의 100년의 한이 웅크리고 있는 곳.

그 기운에 눌려 기가 약한 사람은 그리된다고도 했다.

차를 타고 서서히 통제구역 안으로 들어섰다.

어떤 분들이 계실까?

일반인 공개 구역에서 본 분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손가락도, 눈썹도 없었다.

그 정도면 마주 볼 수 있는데...


그때 전동휠체어 한 대가 지나가고 피디가 스스럼없이 문을 연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손가락이 없다. 코는 뭉개져 있다. 순식간에 눈이 마주쳤고,

‘뭐 하는 것들이야?’라는 눈빛을 쏘며 쌩하고 지나쳤다.

‘괘...괜찮네...’     


5분쯤 지났을까?

꽃 양산까지 치장한 전동휠체어가 또 다가오자, 피디가 반색을 한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아이고. 젊은이들이 어디서 오셨수?”

양산을 반쯤 들어올릴 쯤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양쪽 손이 없고, 한쪽 눈이 없다. 분명 눈이 없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마을안에 도착했고 ‘칼 가는 날’이라 주민들이 모여있었다.

소록도 주민을 악랄하게 괴롭혔던 일본인 관리자를 칼로 찌른 사건 이후,

소록도 칼은 날이 서면 안되는 규율이 수십년간 있었단다.

“그래요? 그렇구나... 아버님 처음 소록도에 오시던 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손가락이 없는 뭉툭한 손을 만지고, 등을 쓰다듬어가며 K피디는 자연스레 취재를 시작했다.

나보다는 앞서 몇 번 왔으니 친근할 순 있지만 너무나 스스럼이 없었다.

좋은 다큐를 만들어달라며 먹을 걸 내주는 어른들께 나 역시 공손하게 인사를 했지만

나는 그들을 만질 수는 없었다.

그 카메라 감독처럼 단호하진 못했지만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거기 작가 선생! 이 칼 좀 저기 202호 김씨한테 갖다줘요! 저기 보이지?”

얼떨결에 칼을 받아들고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202호로 향했다.      

“계세요! 칼 가지고 왔는데요”

빈집인가 싶어 방안에 넣어 줄 요량으로 문을 여는 순간 문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오고 있는 분과

눈이 마주쳤다.

한쪽 눈이 형체를 모를 정도로 주저앉아 뭉개진 코까지 가 있었다.

무릎 아래로 한쪽 다리는 없었다.

양손 역시 손가락은 없었다.

머리카락과 눈썹도 없었다.

그 얼굴로 활짝 웃고 계셨다.

웃을수록 일그러졌지만 입꼬리가 분명 웃고 있었다.

“들어와, 들어와 봐.”

부정확한 발음으로 한쪽 팔을 힘껏 흔들었다.

“아... 칼 가지고 왔어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말씀하세요”

들어가지 않겠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지만

더 세게 팔을 흔들며 들어오라고 했고 나는 칼을 문 앞에 두고, 문은 활짝 열어둔 채 한 걸음 들어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왜... 요?”

빨리 말하시면 들어주고 가겠다는 마음을 담아 더 크게 말했으나

그 말엔 답도 없이 힘겹게 아주 힘겹게 냉장고를 향해 몸을 끌고 가셨다.

무서웠다.

‘피디는 여기서 안보이는데... 그냥 나갈까?’

끙끙 신음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열렸고, 아까보다 더 일그러진 얼굴로 활짝 웃으셨다.

냉장고에 가득 찬 박카스, 비타500, 콩두유...

“가져가, 다 가져가...”      


‘하아...’ 안도와 창피함의 탄식이 함께 터져나왔다.

투명한 음료 병에 그 마음이 들킬새라 얼른 한 병을 들고 나오려 했으나,

온몸과 얼굴로 필사적으로 나를 막아섰기에

열 병 넘게 음료를 비닐에 담고서야 그 방에서 ‘풀려’ 나올 수가 있었다.      


그 마당을 되돌아 나오며 내 한심한 민낯에, 편견 가득한 속내에 귀까지 빨개졌다.

문 앞에 앉아 손을 흔드는 줄 알았으나 뒤돌아볼 수 없었다.

‘이런 내가 어떻게 저들의 모진 세월을 쓸 수 있을까

오그라든 손으로 피워낸 처절한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좋은 일한다고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

긴장해서 경직됐던 모든 감각이 부끄러움으로 다 채워지고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소록도 취재를 세 번 더 갔고,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되는 촬영장에도 갔다.

단종수술을 했던 폐허에,

바람과 반대방향으로만 서야 했던 수탄장 거리에,

돌아눕기도 좁은 방안에 계속 가서 서 있었다.

허물어져가는 기억 속에 남은 애환을,

파도가 잡아끄는 100년 전의 울음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 초라한 글빨에 담기 위해 우두커니 섰었다.   



우리의 다큐는 이런 소재의 다큐가 늘 그렇듯 메인 채널 편성을 따내진 못했지만

그 퀄리티와 진정성을 인정받아 관련 협회에서 주는 ‘이달의 다큐상’을 수상했다.

몇 달간의 수고와 열정페이는 위로받았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에 관심을 가져주는 단체가 있음에 감사했다.

어둡고 아픈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것에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래서 돈을 대는 이도 없다.

나 역시 무관심 속에서 나의 열심과 노고를 갈아 넣어야 하는 일에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응원하고 박수를 보낼 뿐,

한 달에 몇만원 기부하는 것 이상의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지난 몇 달간 나답지 않게 나름 의미있는 일을 하느라 피로도가 꽤 높아졌다.

새로운 아이템을 기획하고 취재하고 구성해서 완성해야하는 특집 다큐는

상당히 품이 많이 들고,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만큼의 페이를 보상받는 것도 아니었다.

수개월 간 작업 후 결국 방송이 나가야 작가료를 받기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도 길었다.

그 사이 아이들 꼴, 집안 꼴이 어수선해지는 것도 견뎌야하니.

결국 보람과 의미를 찾기보다 나는 이미 구성이 짜여지고,

매달 작가료가 통장에 따박따박 박히는 프로그램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녹동항 핫플레이스에서 맛을 들였던 말차라떼를 사서 한 모금 들이키던 차

K피디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회식 이야기겠지?’

“작가님! 저번에 낸 기획안 제작 지원받게 됐어요.

‘고독사’ 랑 ‘폐교 살리기’ 아이템이 있는데 어떤 거 하실...”


‘음... 이제 그만...’      


‘돈 안 되는 다큐를 선택할 수 있는 사치’는 그때의 내겐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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