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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작가 Oct 10. 2024

충분히 충분하다

어떤 취약함이든지 그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힘은 결국 내 안에 있다고 나는 예전부터 믿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언젠가부턴 나의 취약함, 때로는 찌질함이 바닥으로 치달을 때에도 크게 두렵지 않아졌다. 오히려 그 취약함에서 충분히 헤매도록 기다려주기도 했고 그런 후의 단단함은 더 밀도 있어지는 것도 경험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이 매번 아픈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말이다.      




아침 일찍 방송작가협회에서 지원하는 건강검진을 받고 나오던 길이였다. 따듯한 햇살에 모래냄새가 살짝 섞인 봄바람이 부는 날이였다. 그런 날이면 봄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는 건지 괜시리 발뒤꿈치가 들썩여지면서 평소 나답지 않게 마음이 뭉게뭉게해진다. 그날도 그랬다. 

건강검진 장소가 여의도였고, 마침 녹음실은 검진 장소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더빙하는 거나 보러 갈까’     

괜시리 여기저기 팔랑팔랑 인사가 하고 싶은 날, 기분대로 걸음을 옮겼다. 더빙은 한참 진행되고 있었고 뜻밖의 등장에 녹음실장님은 반색을 했고, 피디도 의외라는 듯 손인사를 건넸다.      

솔직히 내가 쓴 원고를 성우가 더빙하는 걸 보는 건, 몹시 민망한 일이다. 절대 녹음실을 가지 않는다는 후배 작가가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조금 부족할 수 있는 내 원고에 음악과 그림과 성우의 실력이 덧입혀져 근사해지는 순간을 느껴볼 수도 있다. 나는 그 기분을 가끔은 느끼고 싶어하는 편이였다. 별탈없이 녹음이 끝났고, 실장님과 피디와 근황을 나누며 건강검진을 받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이 성우도 인사를 하러 왔다. 

프로그램에 돌아온 뒤엔 한 번도 인사를 한 적이 없었으니 꽤 오랜만이였다. ’반갑다, 오랜만이다‘라는 형식적인 인사만 건네고 갈 거라 생각한 그때, 그는 예고편도 없이 뜻밖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당 작가님들 네 분 다 얼굴을 도통 볼 수가 없어서’

‘예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작가님께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작가들께도 하고 싶은 말이긴 한데...’ 라며 그가 꺼낸 말의 요지는 이거였다. 

‘작가들은 음악과 종편 작업이 되기 전 가편본을 보면서 원고를 쓰다 보니 원고에서 생생한 느낌이 조금 떨어지는 면이 있다’ 라는 것. 

물론 ‘작가님들 원고를 제가 감히, 제가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라며 거듭거듭 마음 상하지 않게 덧붙였지만, 말과는 달리 내용은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수준이였고, 작정을 한 듯 그동안의 생각들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작가들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면서 왜 나한테 이렇게 본격적으로 말하는 거지?’

‘내 원고 이야기는 아니라면서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도대체?’     


느닷없이 날벼락을 맞은 나는 침착하려 했지만 이미 말은 버벅거렸고, 궁지에 몰리는 듯한 눈빛으로 도움을 구했지만 분위기가 애매하다 싶었는지, 피디와 실장님은 슬그머니 자리까지 피해버렸다. 그렇게 들떴던 기분을 한순간에 초치고 들어온 날 이후, 나는 한동안 밤마다 이불킥을 해댔다.  

    

‘하필 그날 그 이야기를 한 건 내 원고가 맘에 안 들었다는 거 아냐?’

‘아니 나는 그날 뭐하러 풀쑥 거길 가가지고...’     


작가에게 원고는 실력에 대한 평가이기도 했고 자존심이기도 했기에 예민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더하고 덜하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때로는 ‘예쁘다’는 말보다 ‘글 잘 쓴다’는 말이 더 기분 좋기도 했으니 ‘더한 쪽’ 일 것이다. 그랬었기에 그때의 일은 꽤 뒤끝이 길었고 공식적이든 회식 자리든 성우를 만날 때면 그날의 당혹함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 후로 해를 한참 넘기고서 기억이 희미해져 갈 무렵, 어떤 날이였다. 언젠가 답사가던 날 아침, 조연출이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작가님, 저 어제 성우님이 작가님 원고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요."

“어, 그래?” 불쑥 나온 이야기에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려던 차, 피디가 왔다. 인사를 하고, 어제 방송본 납품 이야기를 하던 피디가 재차 말했다.

‘작가님 성우가 어제 작가님 원고가 최근 얼마간 읽은 대본 중에 제일 좋았고 그림이랑 느낌도 너무 잘 맞고, 잘 읽혔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래요?"

"음... 아~~ 그랬단 말이죠~” 

뜻밖의 칭찬이 너무 좋기도 하고 또 대놓고 듣는 칭찬이 머쓱하기도 해서 괜히 어깨를 들썩이는 과장된 리액션을 해 보였다.      


‘평소랑 다를 바 없이 썼는데?’

’어디가 좋았던 거지?’ 


붕 뜬 기분이 가라앉지 않아, 먼 산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씰룩거리는 게 창으로 보였다. 너무 히죽거리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 오랫동안 성우에게 상해 있던 마음도 거짓말처럼 스르르 녹는 듯 했다.  

    

‘그런 칭찬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 들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피디가 들었으니 내 체면은 좀 회복됐네...‘     


묵은 체증이라도 내려간 듯 가벼운 기분으로 언제 달려도 좋은 산길을 편히 앉아 가고 있었다. 하늘마저 예쁜 날이면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풍광들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멍 때리며 운전 스트레스도 없이 바라볼 수 있는 답사길, 좁은 산길로 들어서면 종종 전화도 터지지 않으니, 걸려올 전화도 바삐 처리해야 할 전화도 없이 그야말로 마음은 순식간에 평온해진다. ’일을 하러 가면서 이런 호사가 또 어딨나‘ 싶은 시간이 찾아오는 거다. 일을 하다가 이런저런 회의감이 들 때면 ’이제 그만둘까‘ 싶다가도 이런 순간이 오면 ’아니야, 오래오래 이 프로그램을 해야지‘ 간사하게 또 다짐을 한다. 


그렇게 가도 가도 짙은 녹음과 산 능선 굽이굽이 시원하게 드러난 하늘뿐인 창밖을 반나절쯤보고 있는데 문득, ’뭘 그리 안달복달하며 사냐. 그냥 살지. 흘러가는 대로, 무던하게 살지‘라는 생각이 훅하고 파고 들었다. ’하루는 폴짝 뛰어올랐다 또 다음날은 맥빠져 지하를 뚫었다 하지 말고. 매사 간이 오그라붙었다 떨어졌다 하지 말고. 그냥 살아지는 대로...‘

그런 생각에 닿으니 조금 전 들뜬 마음이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마음만은 진짜 그렇게 살고 싶었다. 매일 되뇌기도 했고. 하지만 실제는 연차가 쌓여갈수록  신경이 곤두서는 일들이 더 많아졌다. 20년차를 넘기면서 스스로 내 연차에 놀라거나 어디에 나를 소개할 일이라도 생기면 더 마음이 그래졌다. 기대치에 걸맞는 결과물을 내고 있는지 스스로 자주 잣대를 댔고, 혹시 실망하는 목소리는 없는지 살피기도 했다. 본사 시사에서 욕을 먹거나, 시청률이 덜 나오거나, 제작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나도 어쩐지 나이가 많은 내게 조금 더 책임이 있는 듯 느껴졌다. 

후배 작가들의 원고에 비해 내 원고는 더 깊이 있는지 살펴보기도 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작가들이 하는 타 방송 다큐를 자주 모니터링하기도 했다. 혼자 그런 부담들을 티 안 나게 끌어안다 보니 마음은 자주 너덜너덜해졌다.      


불현듯 조금 전 칭찬에 한껏 좋아했던 나한테 역심이 났다. 이쯤 됐으면 내 글에 대해 스스로 믿거니 하는 게 있어야지. 뭘 그리 남의 칭찬 몇 마디에 날아갈 듯 좋아했다가 또 약간의 지적에도 또 코를 바닥까지 빠뜨리나. 내 경박함에 싫증이 났다. 마치 신이 난 나와 그간 너덜너덜해져 지내던 내가 다른 인격이라도 되는 냥, 속에서 부대꼈다.      


’아 그래 좀 뻔뻔해지자. 24년차 작가라고 다들 대단히 글을 잘 쓰나? 

뛰어나든 좀 부족하든 이만큼 버틴 게 실력이지. 그리고 이만하면 됐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난데없이 엉뚱한 산에다 대고 한참 동안을 불뚝거렸다. 


다른 사람 평가에 이제 좀 그만 휘둘릴 때도 됐다 싶건만 이놈의 마음이란 게 아무리 다짐을 해도 또 맥없이 술렁이게 되곤했다. 타인의 말보다 내가 해주는 말에 좀 더 귀를 열어두고 그만 동요하고 싶지만. 

어떤 말을 골라 듣고 어떤 말을 흘려보낼 것인가 그 정도를 선택할 수 있는 주체성은 이제 가져도 되지 않겠냐며 나를 채근했다. 


’그만 쫄자, 그만큼 쫄았으면 됐다. 까짓!‘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살자고!'

'충분히, 충분하다고!'


말없이 달리는 답사 차 안에서 혼자 이렇게 널을 뛰고 있는 줄, 누가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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