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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May 05. 2024

5월은 푸르구나 아이들아 사랑으로 자라라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어린이날 선물이란.

먼저 오늘 어린이날을 맞이한 모든 어린이들에게 축하의 말을 전합니다. 온 세상에 있는 아이들이 행복하고 밝게 자라날 수 있었으면!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정의하시길 인생의 1/3 나이까지는 모두 어린이라고 하셨기에 100세 시대인 지금은 나 또한 어린이가 아닐까 싶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욕심을 내려놓겠습니다.


어린이날은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보다는 축제 성격이 강한 느낌이다. 어버이날은 자식들이 부모에게 양육한 것에 대한 감사를, 스승의 날은 제자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것과 달리 어린이는 어린이라는 그 자체로 축하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존재만으로 축복받을 수 있는 건 생일을 제외하고 어린이날이 유일한 것 같기도 하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아이들이 적어지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축하해 줄 일이지.


다만 시간이 갈수록 어린이날의 모습이 퇴색되는 건 조금 슬프다. 언젠가부터 어린이들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보다 비싼 선물을 주는 것이 의례가 되어버렸다. 최근 뉴스 기사에서도 5월이 '가정의 달'이 아닌 '가난의 달'이라며,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어도 물가가 너무 올라 사줄 수가 없다는 어떤 분의 인터뷰를 봤다. 물론 평소에 사주지 않았던 비싼 선물을 기념 삼아 사주는 것도 충분한 기쁨을 줄 수 있겠지만 어린이날이 정말 그런 날이었나, 아이들이 바라는 게 진짜 그런 것인가 생각해 보면 아닌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떠오르는 개인적 일화가 있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우리 자매가 어릴 적 많은 곳을 데리고 다녔다. 내가 초등학생도 되기 전에 엄마와 수도권 지하철을 횡단하며 서울을 오고 간 건 물론이고, 다 같이 지방 여행도 꽤 자주 갔었다. 문제는 이런 기억들이 성인이 되고 난 후 그리 명확히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엄마아빠가 TV를 보다 어떤 지역이 나오면 내가 어렸을 때 데려갔다고 하는데, 나는 거길 다녀왔는지 기억이 안 나는 식이다.(솔직히 난 한국지리에 약해서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내가 다녀온 지역명이 헷갈리긴 한다) 그러면 부모님 둘 다 "그러니까 어렸을 땐 저런데 데려가봐야 다 소용없다"라고 푸념한다. 정말 그럴까?


부모님이 의도한 여행의 목적에 비추어 본다면 그 여행은 쓸모없는 것일 수 있다. 제주도에 유명한 백록암을 다녀왔는데 갔다 온 기억을 못 하고, 엄청 유명한 맛집에서 길게 줄을 서 밥을 먹었는데 먹은 기억을 못 한다는 건 '여행지에 가서 경험을 하고 왔다'는 목적을 달성하진 못한 셈이다. 하지만 자식 된 입장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걸 갖고 있다. 바로 '함께 한 기억'이다. 나는 엄마아빠와 어딜 다녀왔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우리가 지루한 여행길을 타파하기 위해 차 안에서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함께 따라 부르던걸 기억하며, 아빠가 보려 노력했던 물안개를 찾기 위해 아침부터 산책길을 휘저으며 다녔던 아침 안개의 차가움을 기억하며, 엄마의 손을 잡고 걸으며 맞았던 제주도의 뙤약볕이 기억난다. 구체적인 기억은 희미하더라도 그 정서와 우리 가족 사이에 형성되었던 감정은 성인이 된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영향을 주고 있다.


내가 그 어린 날 비싼 선물을 받고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간다면 그 순간은 당연히 좋을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다면 내가 8살 어린이날에 무얼 받았는지 기억이나 제대로 할까? 당장 작년 생일선물도 뭘 받았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말이다. 오히려 그런 선물보다는 함께 있을 때의 기억이 훨씬 오래 남는다. 특별하지 않은 선물이라도 부모님과 손을 잡고 선물을 사러 갈 때의 설렘, 내가 원하는 걸 물어봐줄 때 엄마와 눈을 마주친 기억 등. 실제로 나의 어릴 적 가장 선명한 기억은 다서여섯살 땐가. 엄마와 동네에 있는 슈퍼로 인형을 사러 갈 때였다. 그것도 바비나 미미 인형처럼 화려한 게 아닌, 슈퍼에서 파는 사탕에 딸린 종이 인형 같은 것이었는데 그날 나를 감싸던 공기,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던 설렘과 행복감은 지금도 여전히 나를 웃고, 울린다. 그런 기억이야말로 어린이날에 선물 받아야 할 것 아닐까.


부모 경험이 없으니 요즘 아이들의 성정을 몰라하는 말이다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내 조카를 보면서도 그 생각을 한다. 아이들은 단순하고 빠르다. 선물 공세를 퍼붓는 건 아이들에게 잠깐의 기쁨을 줄 순 있지만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눈을 맞추고 놀아주는 게 애정을 얻고 지속가능한 행복을 주는데 더 효과적이다. 조카 역시 조카가 좋아하는 장난감, 옷, 책 등 선물을 주어도 잠깐 반응할 뿐 결국 그 아이를 웃게 하는 건 갖고 놀던 빠방이들을 갖고 (내가 듣기엔 이상하지만 조카에겐 더없이 효과적인) 효과음을 내며 놀아줄 때였다. 그러니, 우리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주자. 우리가 줄 수 있는 시간을 주자. 시간의 질은 장난감의 가격처럼 남들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소중하다. 그리고 그 시간으로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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