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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Jun 27. 2024

중독 중 제일 좋은 중독은? 채식 중독!

너란 건강함에 중독...

지금으로부터 몇십 년 전, 엄마는 과자 다이제스트를 먹었다. 당시 45kg 정도의 자그마한 체구에 식탐이 없었던 그녀는 며칠 내리 하루에 한 통씩 다이제스트를 비웠다. 어느 날 '질리도록 먹었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짧은 기행은 끝이 났다. 몇십 년 뒤, 엄마의 성격을 쏙 빼닮은 내가 태어났다. 나 역시 한 메뉴 혹은 재료에 꽂히면 며칠간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었고, 그 대상은 복숭아, 초콜릿, 빵, 청국장 등 장르를 넘나든다. 그리고 지금, 나는 채식에 중독되었다. 


'중독'이라는 단어를 채식 옆에 붙일 수 있을까. 보통 중독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대상 때문에 해야 할 일들에 방해를 받는지 여부라고 하던데. 끼니를 더 건강하게 할 뿐이지 다른 일상은 침범받은 적이 없으니 단지 급속히 쏠린 사랑의 형태라 표현할까. 자극적인 맛의 회오리에 나를 가두는 마라탕이나 치킨이 아닌 채식에 빠진 이유는 단순하다. 몸이 원하기 때문이다. 튀긴 음식을 떠올리면 저절로 욕지기가 오르고 짭짤한 간을 생각하면 피부에 트러블이 올라오는, 몸이 완전한 보이콧을 선언했을 때는 다른 음식은 입에 들어가지 않는다. 오로지 야채, 그것만 생각이 난다.


지난주 초부터 몸이 보이콧 상태를 보였고 마침 집에 정돈된 야채가 있었다. 그날부터 야채를 마구잡이로 먹었다. 날이 더워지니 쌀밥에 흥미가 덜해 끼니도 샐러드로 먹었다. 말이 거창해 샐러드지 손에 잡히는 오이, 양파, 당근, 쌈 야채 등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냉장고에 박혀있던 드레싱 중 그때그때 끌리는 맛을 골라 섞은 것뿐이다.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물이나 달걀 후라이, 생선구이를 곁들일 때도 있었지만 야채를 주식으로 먹으니 묘한 중독성이 생겼다. 쌀밥은 식후 혼곤히 늘어지고 디저트에 대한 욕구가 죄책감과 손잡고 들이닥쳤는데, 야채를 먹으니 깔끔한 뒷맛에 디저트 생각도 줄고 만일 먹게 된대도 주식을 가벼이 먹었으니 괜찮다는 보상 심리가 생겼다. 디저트는 과일로 통일해 때맞게 나온 들척지근한 복숭아를 자주 먹었다. 자연의 신맛이 가미된 단맛은 언제나 반갑고 기분이 좋았다. 


식단을 바꾸니 신기한 발견을 하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 첫 스타트를 끊는 메뉴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 혈당 스파이크나 위장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다. 잠에서 깨서 처음 먹는 음식이 그날 하루 식단의 톤을 결정한다. 나는 보통 아침 식사로 콩물과 간단한 야채, 과일을 먹는 편인데 객기(?)나 급한 마음에 빵을 먹는 날이면 하루 종일 자극적이고 단 음식만 생각이 났다. 몇 번의 경험 끝에 아침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루 건강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전날 저녁에 다음날 먹을 샐러드를 만들어놓고 자게 되었다. 만만한 메뉴는 당근 라페나 토마토 마리네이드. 둘 다 설탕이나 올리고당, 알룰로스 등의 당을 '이게 넣은 건가' 수준으로 최소화하는 것이 철칙이다. 당근 라페는 사과를 같이 채 썰어 넣거나 집에서 만든 (역시나 당을 매우 적게 넣어 '그냥 오트밀을 볶은' 수준의) 그래놀라를 넣으면 자연스러운 단맛이 올라온다. 토마토 마리네이드에는 쌈 야채 중 아삭한 상추나 치커리를 넣어주면 식감과 영양의 질이 모두 올라간다.



채식 중독은 현재 진행형이다. 외출 후 당이 떨어져 '떡볶이가 아니면 안 된다' 생각하다가 막상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길엔 샐러드 생각이 나 결국 포케를 먹은 적도 있다(먹으면서 이 재료들 다 집에 있는데!!! 이 돈 주고 사 먹을 게 아닌데!!! 하고 울부짖긴 했지만..). 나야 건강하게 먹으니 기분이 좋다 하지만 몸이 "최근 식단 너무 지저분해!!!" 하는 마음에 입맛을 조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오싹해진다. 그래도 몸도 좋고 마음도 좋아진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지. 이유가 뭐라도 답이 채식이라면 오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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