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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Sep 26. 2021

나른하고 잔잔하게

무릎 바로 위에서 끊기는 까만색 아디다스 추리닝을 입고, 얼마 전 재난지원금으로 산 지비츠를 세 개씩 끼운 하얀색 크록스를 신고 집 근처 카페에 나왔다. “루이보스시나몬 주세요” 오, 여기는 디카페인 커피도 되네, 근데 티 마시고 싶어, 하고 혼자 생각했다. 카드를 꽂고 4천 원을 결제했다. 국민 지원금으로 결제되었다고 바로 신한카드 알림이 뜬다.


크록스 지미츠는 너무 비싸게 느껴져서 돈 아까워서 안 샀었는데 골목 좌판에서 파는 것을 보고 여기는 좀 싸겠지, 하고 물어보니 두 개 3천 원이라고 했다. “설마 재난지원금은 안 되겠죠?”라고 물어보니 흔쾌히 “됩니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6개를 샀다. 역시 끼니까 예쁘다. 유치해야 예쁘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과 뿌쉬킨의 <벨킨 이야기>, 그리고 노트 한 권을 겨드랑이에 끼고 나왔다. 대성당을 읽으러 나온 건데 혹시나 읽다가 다른 책이 읽고 싶을 때를 대비해 뿌쉬킨도 가지고 나왔다. 한 권을 읽다가 질리거나 환기가 필요할 때 다른 책을 읽으면 좋다. 카페 문 앞 작은 야외 테라스에 나와 캠핑 의자 같은 데 앉았다. 공간이 작아 남자처럼 꾸민 여자 한 명과 그의 친구인 듯한 여자의 얘기 소리가 잘 들렸다.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남자처럼 꾸민 여자는 굉장히 쿨한 척하고 세상사를 다 아는 어른인 양하는 말투를 가졌다.

일요일 오후. 덥지만 선선한 가을바람이 분다. 반팔 입는 날씨지만 땀이 나지 않는 기분 좋은 날씨. 가을 분위기의 편안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간간히 카페 앞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루이보스 시나몬 티는 따뜻하다. IKEA컵이네, 시나몬 향이 잘 어울리는 스웨덴이라는 나라. 코로 공기를 쐬며 책을 읽으니 너무 좋다. 나른하다. 캠핑 의자는 꽤 편하다. 편하게 누워 낮잠을 자고 싶다. 중학생 때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른해진 느낌 같다. 고3인데 공부가 안 되는 날씨.


문장이 짤막짤막하고 문체와 내용이 쉬워서 원어로 읽기 좋은 책이다. 레이먼드 카버 좋아할 거야, <대성당> 추천이야, 하고 부장님이 추천해줘서 사본 책. 첫 장을 읽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쉽게 쉽게 읽히면서 문학적인 책,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막상 쉽지 않은 류의 글.


한참 집중하며 읽고 있는데 바로  테이블에 40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명과 여자  명이 앉았다. 40 중반이라고 하기에는  입는 스타일은 젊어 보이지만 목소리와 자세히  얼굴은 나이가 들어 보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친해 보였다. 서로를 가명으로 불렀다. 썸방이라는 카톡방에서 만난 사이 같았다. 썸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가상공간인가. 그들은 서로에게 반말을 썼다. 썸방의 다른 사람들을 누가 봐도 가명 같은 이름으로 부르며  안의 비밀커플,  타고 나간 애들이라는 , 누구를   밖에서 봤다는 ,  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등을 옆에 있는 내가 듣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아하며 크게 이야기했다. 그쪽 세계의 용어와 현실 이야기가 섞이며 오랜 시간 들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  이상 친해지지 말자, 며. 익명의 공간에서 만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영화 <풀잎들>에 나오는 김민희가 생각났다. 한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카페를 오가는 여러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기의 이야기를 쓰는 여자.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나오니 좋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말소리, 대화 내용을 들으니 색다르고 재미있다. 연극을 보는 듯, 영화를 보는 듯.


사람에게는 사랑이 간절하다. 사람에게는 사랑이 어울린다. 가을엔 사랑이 어울린다. 뭔가 감성적인 계절 같아서 쓸쓸한 이별이 어울리는 것 같지만 그 안에 사랑이 묻어있다. 여자들이 가을에 많이 사는 마른 장미색 립스틱 색처럼 그윽하고 깊은, 그런 색. 장난기 어린 목소리도, 아이같이 즐거운 웃음도 이제는 진지한 어른처럼 그렇게 목소리를 내야 할 것 같은.


나도 저렇게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편한 남사친들이 있었는데. 나는 고립을 좋아하고 연락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어서 다 연락이 끊겼다. 그냥 자연스럽게. 친구 만나는 게 귀찮다. 그리운 친구들은 있는데 딱히 연락이 귀찮다. 나는 왜 이렇게 모든지 귀찮아하는지. 최소한의 에너지로 사는 사람 같기도 하다.


칼라디움이라는 낙엽색의 가을 색깔이 나는 조그만 식물을 샀다. 갈색과 마른 붉은색 잎의 겉에는 은은한 형광색으로 얇은 테두리가 되어있다. 황토색과 밤색이 그라데이션 되어있는 토분인데 겉이 약간 코팅되어있는 화분에 옮겨 심었다. 회사 자리에 두면 기분 전환이 될 것 같다. ‘칼라디움 물 주기’를 검색한다. 열대식물이라 미지근한 물로 줘야 한다고, 물을 너무 많이 줘도 과습으로 뿌리가 뭐 어떻게 된다나. 햇빛도 쐬줘야 하니 주말에 퇴근할 땐 창가 쪽으로 옮겨줘야겠다.


가을이 너무 좋다. 가을 냄새, 가을 색, 가을바람, 가을 감성, 가을 하늘. 가을에 태어난 것도 좋고 민감한 것도 좋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상대가 힘들 수도 있다. 너무 뜬금없으니까. 설명을 귀찮아해서 머릿속으로는 다섯 단계를 거친 사고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이야기하니 듣는 사람은 엉뚱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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