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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살기 떠나는 3n살 캥거루

by 모네

“P들은 돈을 너무 많이 쓰게 된다.” 팟캐스트를 듣는데 INFP인 사람이 말했다. 사연에서는 기한 내에 써야 하는 쿠폰을 놓쳐서 날리기도 하고 심지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보험금 수령도 몇 년 동안 안 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게으른 건 P와 동의어인가? 부지런한 P가 있고 게으른 P가 있을까? 나도 게으른 P로서 사연들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공감하면서도 뭐 어때, 하고 많은 P들이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들었다. 뭐, 해결 방법이 있겠지. 미리미리 챙기지 않아 돈이나 시간이 더 들었으면 내 업보지 뭐, 하고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적게 받고 금방 잘 넘기는 게 장점인 듯하다. 게을러서도 있지만 P들은 부주의하고 덜렁거리기 때문도 있다. 정신 구조와 주변 정리가 매사에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니어서 되게 느슨하고 손해를 볼 때가 많다.


수십 번의 출국을 통해 짐을 싸고 여행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 정도 정갈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낭비를 싫어하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성격에 기인하기도 하고 여러 여행에서 불편했던 점이 노하우로 쌓여서 그렇기도 하다. 미리 문을 여는지 알아보지 않아 하루를 허탕 친 적도 있고, 나보다 더 심각하게 여유 있던 파트너의 영향으로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도 있고, 여행지에 대해 알아오지 않아 갈 데도 없고 할 것도 없이 그냥 심심한 채로 시간만 날린 적도 있고, 입지도 않을 것 같은 옷도 캐리어에 때려 넣어 무게 때문에 추가 요금을 내기도 하고, 비행시간이 변경된 메일을 받았는데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제대로 안 읽어보고 공항에 갔다가 확인 버튼을 안 눌렀다고 비행기값보다 비싼 100 몇 유로를 물 뻔한 적도 있다(으으. 유럽 저가항공. 이건 사실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한다. 승인 버튼을 눌러야지 확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고 크게 써놓던지. 그런 게 보이지도 않았는데 안내도 제대로 안 하고 이렇게 비행기값 보다도 비싼 값을 내라고 하면 어떡하냐. 무슨 사채업자냐. 어글리 코리안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따졌더니 이번만 넘어가 주겠다고 했다. 이게 내가 잘못한 건가?)


아무튼 조금 발전된 나는 이제 메모장에 캐리어에 가져갈 것, 기내에 가져갈 것을 구분해서 체크리스트를 만들고 하나씩 체크해 가면서 짐을 싼다. 그러면 그냥 생각나는 대로 싸다가 나중에 이미 다른 나라에 도착해서야 아 맞다! 할 일이 줄어든다. 이렇게 몇 주 전부터 생각나는 대로 체크리스트에 싸갈 것을 적어 놓아도 짐을 다 싸고 밤에 누웠는데, 아 그거 안 쌌네, 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태국 가는데 바트화도 1. 미리 환전, 2. 한국돈 5만 원 가져가서 환전, 3. 현지 ATM 출금 옵션 중에서 뭐가 제일 유리할지 챗 지피티와 논의해 가면서 찾는다. 평소라면 그냥 3번 옵션을 택하고 빈 몸으로 가겠지만 수수료 면제되는 해외사용 체크카드로 ATM 출금을 해도 만원 가까이 되는 현지 ATM 수수료가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찾아보는데 우리은행 환전이 하나은행 환전보다 50%로 환율 우대를 해주고 현지 수수료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보통 한국에서 환전해 가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산해 보니 환전 주머니로 환율이 낮을 때 바꿔놓았다가 출국하는 날 공항에서 찾으면 더 이익이다.


바트화 색감이 너무 예쁘다. 은은하게 화려함

마침 바트화가 최근 한 달 중에 가장 떨어진 날이어서 40만 원 정도만 바꿔가기로 한다. 바트화가 41.53이어서 아, 이게 더 떨어지려나 하고 보다가 1분에 한 번씩 계속 네이버에 ‘바트’ 하고 치는데 1원씩 1원씩 점점 오른다. 그래서 41.60 정도가 되어서 아 그냥 바꿔야겠다하고 우리은행 환전 주머니를 켜서 환전하시겠습니까? 예! 하고 누르는데, 12개월 이상 장기 미사용 고객이라 출금이 안된다고 알림이 뜬다. 거의 10년간 사용하지 않았어서 그런가 집 어딘가에 있을 우리은행 통장을 뒤적거려서 본인 인증을 하려고 보안카드 번호를 입력하는데 계속 오류가 나더니 3번 연속 잘못 입력해서 잠겨버렸다. 펼쳐져 있는 우리은행 통장엔 07년도에 통장을 처음 만들었다고 쓰여있다. 너무 오래되서 보안카드 숫자도 바뀐걸까?악. 뭘 해보려고 하니 왜 이래. 그 와중에 환율은 계속 오른다. 아, 은행도 문 닫을 시간이고 내일은 주말인데 은행 가서 해제할 수도 없고 일단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중년 여성 목소리의 콜센터 상담원이 내가 앱을 열어 조치를 완료하기까지 확인하며 기다려 주었다. 대충 이렇게 하세요~ 안되면 다시 전화 거세요~ 가 아니라 해결될 때까지 기다려줘서 놀랐다.

아무튼 출금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환율 동향을 더 보다가 다시 또 떨어지길래 맨 처음 가격보다는 올랐지만 뭐 총액 300원 정도 차이라서 적정한 가격에 환전을 잘했다. 주식도 이렇겠지. 나는 주식하고 안 맞겠다,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가격 변동으로 멘탈이 안정이 안되어서야.


역시나 버스 예약한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뙤약볕에 공항 리무진을 기다리면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가 왔다. 외출 중인데 근처에 있으니 여기 정류장으로 오겠다는 것이다. “왜? 뭘 여기까지” “그래도 두 달을 가는데 너 얼굴 볼려고” 해서 “아이 됐어. 그냥 다음 주에 봐(다음 주 말쯤에 엄마가 친구들하고 놀러 오기로 함)” “아 그래? 아 멀긴 멀다. 그래 조심히 가~” 하고 또 해맑게 끊는다.


발리에서 산 발목까지 오는 하늘하늘한 실크 원피스를 입고 베이지색의 짤랑 거리며 소리를 내는 슬리퍼를 신고 한쪽다리를 아저씨처럼 다른 한 쪽 다리에 올린 나는 멀리서 날 바라보면 참 TPO에 맞지 않네, 하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누가 보면 인천공항을 가는 사람이 아니라 동남아에서 여행하고 돌아오는 사람인 줄 알겠어. 소라게에서 탈출해서 공항을 가는 딸의 얼굴을 보러 오겠다고 한 부모에게 별로 감동하지 않는 대문자 T.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의 고윤정 캐릭터가 생각났다. 예쁜 여주인공을 떠올리며 물 타는 나.


출처: 뉴스1

그거 생각났다. 나혼자산다라는 프로그램의 전현무가 자기는 어머니가 오신다고 하면 설거지를 쌓아둔다고 해맑게 말하는 것. 나이 50이 되도록 철부지 불효자라고 원성을 사지만 나는 ’어, 나도 그러는데, ‘하고 공감하였다. 나도 집에 혼자 있어도 설거지 쌓아 놓고 엄마가 하는데. 이것의 장점은 아주 가끔 한 두 달에 한 번 정도 설거지를 하면 엄마가 설거지를 해놨다고 감동한다. 사회적 문제로 뉴스까지 나오는 나같이 철없고 게으른 캥거루족들은 이 삶이 안락하다. 집에서 엄마가 청소 빨래 설거지 다 해주고 옷도 드라이 다 맡겨다 주고 먹을 것도 해주는데.


캥거루족으로 살다가 made in India의 실크드레스는 주워 입고 나와 캐리어를 끌고 끙끙대며 지하철 역을 오가는 공주병 환자인 나는 이제 누가 도와줄 사람 없이 혼자서 두 달을 지내야 한다는 현실을 마주한다. 이제 비행기 타기 15분 전. 트립닷컴에서 무료로 준 마리나 라운지에서(아니 아직 7월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공항에 사람이 많은겨. 라운지도 줄을 서네ㅠㅠ) 키감이 사랑스러운 thinkpad로 글을 쓰다가 덮고 이제 5시간 남짓 허리 아프고 지루하고 방사선(인지 방사능인지 둘 차이가 뭔지..) 쐬는 시간을 보내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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