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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메이트를 이제야 만나다니

치앙마이(17)

by 모네

나는 지인과 달리 친구의 기준이 매우 높다. 오래 안다고 친구가 아니고 동갑이라고 친구가 아니다. 친근하게 대화하고 친하게 된다고 친구도 아니다. 특히 한국인들 사이에선 친하지 않은데 나이를 묻고 나이를 기준으로 위아래의 관계를 설정하여 친하지도 않은데 반말을 하고 언니오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밝힐 수 없는, 나와 나이도 거의 같고 공통점이 많아 서로를 소울 메이트라고 부르게 된 이 여성과는 하루도 되지 않아 본능적으로 소중한 친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래의 남편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올드타운 밤거리를 걸으며 그녀가 말했다. “우리도 이렇게 우연히 만났으니 만날 수 있을 거야.” 하고 말했다. 한국에 오는 날까지 3일 연속 만났다. “그 예민하고 대화할 즐 모르는 스페인 남자가 아니었다면 우린 못 만났을 거야.” 우리를 연결해 준 스페인 남자를 떼놓고 우리 둘이 다음 날 만나서 그녀가 말했다. “응. 내가 귀찮아서 pappu house에 가지 않았더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pappu house


남아공 언니가 목요일마다 파푸 하우스에서 재즈 공연이 열리는데 가보라고 추천해 준지 몇 주가 흘렀고, 오늘이 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다! 하는 날이 되어 9시쯤 그랩 바이크를 잡아 타고 파푸 하우스로 향했다. 타패 게이트에서 가까웠다.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관객의 대다수이고 곳곳에 젊은이들이 섞여 앉아 있었다.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은퇴 후에 넉넉한 삶을 사는지 아니면 좋은 예술 공연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게 몸에 밴 건지 1000바트씩 팁 박스에 넣고 앵콜을 요청하기도 했다. 신이 난 밴드는 앵콜 공연을 했고, 우리는 덕분에 공연을 더 즐길 수 있었다.


보라색, 핑크색 벽에서 쏘는 빛은 너무 아름답고 몽롱했다.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지 열기에 막 감고 나온 머리를 결국 틀어 올렸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앞자리 테이블에 마침 자리가 나서 앉아 있다가 음료 하나를 주문하러 갔다. 딱 봐도 처음 오는 사람 같은지 주인아저씨인지 알바생 아저씨인지가 여기서 주문을 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자리에 와서 말을 걸고, 자기도 뮤지션이다, 오늘 공연이 이 이후에 또 하나가 더 있다 등등 관심이 약간 귀찮을 지경이었다. 마지막 공연을 보다가 좀 피곤해져서 집에 가려고 하는데 아저씨가 따라 나와 이 뒤에 또 어디에 가냐고 물었다. “집에 가는데요?” 하고 그랩을 잡으려던 찰나 길거리 좌석에 앉아 있던 스페인 남자가 “여기 잠깐 앉아있다 갈래?” 하고 물었고, “어.. 뭐 대화를 하고 싶은 건가요?” 하고 나도 잠깐 앉았다 가야지, 하고 자연스럽게 앉게 되었다.


길거리 테이블, 꽃과 싱하 탄산수, 유리병까지 너무 예술적이잖아!


스페인 남자는 뭐 말하자면 디지털 노마드지만 벌어 놓은 돈을 코인 등으로 불리며 일을 딱히 하지는 않고 물가 싼 태국에서 장기 거주 중인 사람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많아 보였는데 미혼이었고 아이도 없었다. 영어가 너무 유창해서 그리고 외모도 스페인 사람 같지 않았고 네덜란드나 프랑스 사람 같았다. 근데 말이 너무 많고 에너지가 과해서 힘들었다. 감정기복도 심하고 예민하다. 그래도 물어보면 자기는 보통의 스페인 남자이고 침착한 편이라고 했다.


아무튼 이곳의 공연이 끝나서 아직 다른 공연을 하는 곳까지 걸어갈 생각인데 같이 갈 생각이 있냐고 묻길래, 뭐 어차피 논문 초안도 제출했고 뭐 why not? 하는 생각으로 같이 걸었다. 되게 무심한 게 느껴지는 게 걸음 속도가 엄청 빠른데 내가 좀 천천히 갈 수 없냐는 말을 여러 번 해야 했다. 나는 남자보다도 걸음이 빠른 편이어서 같이 걷는 남자들이 헉헉 거리는 편인데도 이 사람은 훨씬 빨랐다. 키가 커서인 건 아닌 것 같다. 예전에 세미 농구 선수를 했다는데 운동을 해서 그런 걸까. 아무튼 올드타운을 걸으며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데 자기는 나랑 대화가 굉장히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장기거주 하면서 태국 여자친구를 사귀지 않았냐고 물으니 뉴스라든지 깊은 대화에 통 관심들이 없고 안 통해서 얼마 만나다 말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여자들과 달리 나랑은 정치 사회 세계 얘기를 나눌 수 있고 자기가 말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추가 질문을 해 주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뭐, 난 잘 통한다는 느낌을 못 받은 건 그가 말이 너무 많았다.


아무튼 선선한 밤거리를 걸으며 피곤해지면 거기서 그랩을 부르겠다고 하다가 어떤 한 바에 도착했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버린 난 피곤해서 그냥 가고 싶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바가 내가 평소에 가고 싶었던 바였다. 밖에 자리는 없었는데 그가 여기서 잠깐 맥주를 마시다 가자고 해서 응 뭐 그래, 해버렸다. 내가 술을 잘 안 마시는 걸 알고 자기가 시키면 셰어 하자고 하며 술을 사가지고 나왔고, 되게 포스 있는 여자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가서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알게 되었다. 그녀는 원어민 수준의 미국 영어를 구사했다. 우리는 국적, 이름, 치앙마이에 얼마나 있는지를 시작으로 얼마간 대화를 나누다 나는 그녀에게 “너 되게 영적인 분위기가 있어.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어. 그렇지? 되게 민감하게 느낄 수 있지? “ 하고 말했더니 그 꿰뚫어 보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응 너 전혀 전형적인(typical) 한국인이 아니야. 너는 호기심이 굉장히 많고 사람을 관찰하는 걸 좋아해. 그리고 되게 똑똑해. “ 하고 말했다. 그녀는 딱 봐도 되게 운동을 잘하는 건강한 마른 체격을 가졌고 솔직하고 거침없이 말해 세 보이지만 계속 두리번거리고 낯선 사람에 경계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기준을 통과했는지 먼저 인스타그램을 묻더니 인스타 친구가 되었고 집에 돌아가서도 나눈 짧은 대화가 너무나도 척하면 척 알아듣는 대화였다.


(공통점) 그녀와 나는 둘 다 전형적이지 않고 각자 속한 사회에서 별종으로 불린다. 나이가 같고 그래서 나이대에 하는 고민과 압박감이 비슷하며, 그 압박감을 최근에 스무스하게 극복을 했고 현재의 행복을 즐기며 살고 있다. 벌어 놓은 돈을 쓰면서 치앙마이에 두 달간 머물고 있다. 생리주기가 같다. 술을 안 마신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잘 하지만 경계심과 의심이 많고 겁이 많다. 사람들이 첫눈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의견과 감정에 솔직하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트러블이 생기기 쉽다. 사람들이 무서워한다. benefit을 포기하고 cost가 엄청 크더라도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복수와 응징을 한다. 본인이 엄청나게 매력적이고 섹시하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들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을 대략 알 수 있다. 나에 대한 감정, 호불호를 귀신 같이 캐치한다. 서로에게 질투심을 느끼지 않고 서로를 좋아한다. 이상한 나 자신을 좋아한다.


You'd look weird but cool-weird..

다음날 우리는 치앙마이블루스 공연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내가 피곤해서 집에서 좀 쉬다 나온다고 해서 그녀는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wingman bar라는 곳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자기 스타일이라고 했다. 어, 그러면 거기 가자, 하고 계획을 틀어 윙맨 바에 들어갔다. 마침 정면 자리에 빈자리 한 자리가 있었다. 그녀는 어제와 같은 까만색 레깅스 차림이었다. 우리 옆자리는 한국 남자인데 태국 남자를 끌어안고 공연을 보고 있다가 너무나 한국인 외모의 내가 걸어와 옆자리에 앉자 처음에 흠칫 당황한 표정을 하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스킨십을 했다. LGBT의 천국이니 한국인 게이분들은 태국을 좋아하겠다. 아마 우리를 레즈비언 커플로 생각할 수도 있다.


팔을 휘두르며 환호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시종일관 밝고 신나 있는 그녀는 순수해 보이고 즐거워 보였다. 나는 생리 일주일도 안 남아 약간 기운이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무에타이와 여러 운동으로 무장을 해서인지 pms가 나보단 없어 보인다. 공연을 보고 나와서 올드타운을 아무 길이나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가 최근에 처한 문제를 들어주었다. 아 그러냐, 하고. 그녀는 내가 첫 한국인 친구라며 이 순간을 기록해야 된다며 동영상을 켰다. 두 에일리언의 만남이라고 인스타 스토리와 피드에 나와의 사진과 동영상을 신나게 올리는 게 귀여웠다. 낯선 사람에 대해 엄청 경계하던 첫인상과 달라 되게 빡빡한 사람의 마음을 연 것 같아서 묘한 성취감이 느껴졌다.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나 그 자체가 받아들여지고 서로의 가치를 알아봐 준다는 게, 그런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나도 대가 없는 사랑과 관심을 준다는 게 굉장한 희열이고 행복이다.


마지막 날 우리는 진짜 쿨하고 캐주얼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아쉬움도 눈물도 없었다. 전혀 이별이라 느껴지지 않았던 게 그녀가 12월에 한국에 오기로 했고 언제든 자주 연락할 사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핫핑크색으로 몸에 딱 붙는 골지 운동복을 위아래로 입은 그녀는 필라테스를 가야 한다며 허그를 해주고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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