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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May 28. 2024

한 달간의 수능 모드

  9월 모의고사 이후 학원에서 있었던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수능 시험일이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초조해졌다. 고작 두 번의 시험에서 450점이 나온 게 전부였던 나는 내 목표인 475점을 달성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내 실력이 아니라 그저 두 번의 운에 불과한 건 아닐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데미안과 나는 국채보상공원에 나가 잠시 휴식을 취하곤 했다. 날씨가 좋아 예쁜 옷을 입고 나온 커플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심지어 재수학원 커플들도 있었는데, 도대체 공부를 하러 온 건지 데이트를 하러 온 건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자세히 보니 선남선녀였다. 특히 흰색 레이스 블라우스와 밝은 색 주름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은 키가 크고 굉장히 날씬했다. 그 여학생은 우리 학원 퀸카였다. 저런 복장을 하고 재수학원에 온다고?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 남학생은 의대 합격이 거의 확정적인 부잣집 도련님이고, 그 미니스커트 여학생은 도련님이 예전부터 만나오던 여자친구라고 했다. 도련님이 재수하게 되면서, 내조하기 위해 그 여학생도 뒤따라 입시학원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저 녀석이 예쁘게 화장하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속에서 부아가 올라 왔다. 나는 이 분노마저도 수능 점수를 올리기 위한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내가 저것들만큼은 꼭 이번 수능에서 이기고 말겠다고 결심했다. 약해진 내 마음은 다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확실히 교실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더 무거워졌다. 이번 수능을 포기하는 학생들도 속출했다. 그들은 내년 수능을 준비해야겠다고 떠들었다. 나는 그 녀석들을 쳐다보며 '아무 생각 없고 속편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반대로 마지막 전의를 활활 불태우는 친구들도 늘어났다. 이런 친구들을 쳐다보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너무 긴장되어서 가슴이 쿵쾅쿵쾅거렸기 때문이다. 

  

  10월 모의고사 점수는 462점이었다. 역대 최고기록이었지만 여전히 목표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반 석차는 확실히 10위권 안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아직 1등의 시상대는 멀어서 구경도 못할 정도였다. 과학 점수는 약간 올랐지만, 다른 과목들은 9월 모의고사와 거의 비슷한 성적이었다. 

  

  수능이 딱 한 달 남았을 때, 나는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도저히 학원 교실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교실 바깥으로 나가면 괜찮았다. 그러나 교실 안으로 들어가 다른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공황장애가 온 것 같다. 내가 목표를 너무 높게 세운 것이었을까? 나는 지난 5개월동안 한 번도 모의고사에서 475점을 받지 못한 현실, 아직 한 번도 1등하지 못한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나보다 뛰어난 실력을 지녔으면서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자격지심을 느꼈다. 결국 나는 학원에 나가지 않았다. 아니, 너무 두근거려서 학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집에 가서 속옷, 양말, 검은색 츄리닝 한 벌을 챙겨 할머니 집으로 갔다. 할머니께 수능 칠 때까지 여기에서 지내겠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공부하는 나를 보며 늘 안쓰러워하셨다. 우리는 종종 이런 대화를 나눴다.


  "일섭아, 몸 상한데이. 공부 조금만 해라."

  "알았데이. 내 알아서 하께."

  "뭐할라꼬 서울에 갈라카노?"

  "조타카이 나도 한 번 가볼라꼬."


  그 한 달이 할머니집에 대한 내 마지막 추억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바보 같은 손자는 야속하게도 할머니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어떻게든 절망의 도시인 대구를 떠나 기회의 도시인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다. 서울대학교니 높은 목표니 하는 이런 것들은 모두 다 핑계에 불과했다. 내 본심은 그저 비정상적인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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