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 다 외우라고요?
합격문자가 왔다. 당장 다음주부터 출근하란다. 좋은 사람 밑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내 생존 본능이 대구에서 더 멀리 도망가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대구에는 내 인생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아빠가 있다. 다시 대구로 돌아가는 것은 간신히 빠져나온 시궁창에 스스로 돌아가는 격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강원도에서 새롭게 출발해보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약국과 가까운 곳에 있는 원룸을 계약하고, 짐을 옮겼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의 특이한 결정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서울대학교를 나와서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도 아니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강원도 산골로 떠나겠다는데 가족과 친구들은 내 결정을 존중해주었다.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감사했다.
산약국에 첫출근하는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날 원룸에서 약국까지 걸어간 골목길의 풍경, 저 멀리 약국의 간판이 보일 때 긴장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첫날부터 나는 출근하기 싫었다. 낯선 사람들과 만나서 관계 맺는 게 두려웠다. 분명 큰 실수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취업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언젠가는 부딪쳐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과거의 가난하고 소심한 나의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약국에는 직원이 많았다. 약국장님, 매니저약사님, 근무약사 1명, 조제보조직원 3명, 전산직원 2명, 관리팀 3명 이렇게 모두 11명이나 약국 안에서 일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보이는 직원의 두 배가 조제실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약국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직원들은 내게 "약사님"이라고 불러주셨다. '약사님'이란 호칭은 4년간 힘들게 공부했던 내 노고를 다 잊게 만들어주었다. 나의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그 호칭은 움츠려있던 내 어깨를 펴 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만나는 직원마다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매니저 약사는 내게 수습기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수습 기간은 총 3개월이며, 매니저 약사가 필요하다고 여길시 연장할 수 있었다. 수습기간 급여는 정확히 기억하지 않는다. 정규직 급여의 80-90%를 받았던 것 같다. 그 대신 나는 수습기간동안 그 어떤 업무상의 책임도 지지 않았다. 매니저 약사는 나의 사수가 되어 나에게 약에 대한 지식 및 정보를 가르쳤으며, 약사로서 약을 조제하고 투약 및 복약지도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모든 직원들은 매니저약사의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 아래 똘똘 뭉쳐있었다. 그들은 수습 약사가 무슨 사고라도 치진 않는지 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며, 특이사항을 매일 매니저약사에게 보고했다.
약국장님은 첫인상처럼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늘 운동복차림으로 먼거리를 걸어 출근하셨는데, 나를 볼 때마다 해맑은 표정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약국장님은 늘 내게 먼저 다가와 힘들고 어려운 일은 없는지 체크하셨고, 이따금씩 썰렁한 아재 개그를 날려서 나의 긴장을 풀어주셨다. 열흘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약국장님은 단둘이 있는 곳에서 내게 전혀 예상치 못한 고백을 하셨다.
"난 처음에 너를 뽑지 않으려고 생각했었어."
나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장이라면 더 똑똑한 서울대생을 직원으로 채용할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약국장님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나의 모난 성격을 파악했을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 약사들은 다 강원대 출신들이거든. 이 친구들이 혹시 널 보고 주눅 들거나, 너에게 질투를 느낄까봐 걱정했어. 네가 왕따당할 수도 있고."
나는 약국장님께 성이와 나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성이는 내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성이는 오히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고, 나를 좋아했다. 나는 약국장님의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라고 여겼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요? 다 똑같은 약사고, 그분들이 저보다 더 일 잘하고능력 있으신 분들인데요. 저도 열심히 해서 한 사람분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며칠 후면 대학교 졸업식이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내게 꼭 참석해달라는 연락이 왔다. 졸업식에 참석하려면 휴가를 써야 했지만, 나는 수습기간 중이어서 연차가 하나도 없었다. 졸업식에 꼭 참석하고 싶은 나로서는 굉장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약국장님께서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셨기 때문에, 나는 용기내어 말하기로 결심했다.
"조약사님, 죄송하지만 제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게 뭔데?"
"사실 이번 주 금요일이 제 졸업식입니다. 졸업식에 참석해도 될까요?"
"아, 당연히 졸업식에 가야지. 축하해. 근데 졸업할 때 앞에서 무슨 상이라도 받아야지?"
"네. 저는 총장님께서 주시는 최우등졸업 포상과 학장님께서 주시는 우수상을 받습니다."
조약사님께서는 농담으로 졸업식 포상에 대해 말씀하신건데, 나는 진지하게 맞받아쳤다. 조약사님은 살짝 놀라신 표정을 지으신 뒤에 크게 소리 내어 웃으셨다.
"축하해. 정말 축하해. 오늘 졸업축하 파티라도 열어야겠다."
"네?"
"얘들아 케이크 하나 사와라."
"......"
생일이 아닌 날에 케이크의 촛불을 분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일을 크게 키운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모두가 진심으로 졸업을 축하해주자 나는 행복을 느꼈다. 조약사님께서는 직원들에게 내 졸업포상을 자랑스럽게 공개했고, 직원들은 웅성웅성거리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오랜만에 학교에 가니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동기생들과 선후배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하니 졸업식장에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안면이 있는 교무실장님이 내게 다가와 내 이름이 붙어있는 지정석으로 날 인도해주셨다. 교무실장님은 내게 차석 졸업을 축하한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석과 차석의 평균평점 차이가 0.003점 밖에 되지 않았다. 아무 과목이나 한 단계만 더 높은 성적을 받았더라면 내가 수석 졸업생이 되었을거란 생각을 하니 갑자기 아쉬움과 후회가 몰려왔다.
'그 때 실험조교와 싸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과목은 수강취소했어야 했는데.'
'장애학생 도우미는 2명인데 나 혼자 일을 거의 다했어.'
나는 이를 통해 단 한 번의 선택과 실수가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만약 내가 수석으로 졸업했다면 난 더 교만해졌을 것이고, 더 허무해졌을 것이다. 교만과 허무감은 내가 세상으로 나아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내게 겸손을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는 지난 몇년간 몸소 체험했다. 그래서 나는 이 겸손을 하나님께세 내게 주시는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마음 깊숙한 곳에 새겨넣었다. 차석 졸업도 내게는 매우 만족스럽고 훌륭한 업적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나의 끈질긴 노력은 결국 최우등 졸업이라는 포상으로 열매 맺었다. 어느새 내 마음 속 후회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함으로 바뀌었다.
학장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1학년 때 중도인생이라고 놀림 받았던 모든 서러움이 한 순간에 씻겨내려가는 것 같았다. 학장님께서 내 목에 메달을 걸어주실 때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학장님께서 한 번 더 내 이름을 부르셔서 단상 앞으로 올라갈 때에는 발바닥이 부웅 떠서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인식되었다.
나의 서울대학 생활기는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 내 발은 예전처럼 다시 무거워졌다. 약국으로 가는 출근길은 결코 적응되지 않았다. 매일 약국에 출근하기 싫었고, 저 멀리서 약국 간판이 보이면 오늘은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빌었다. 약국에서 나는 최대한 투명인간처럼 조용히 약의 위치, 모양, 성분, 특징을 메모했다. 나도 하루 빨리 트레이닝 시험을 통과해 한 사람의 어엿한 약사가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