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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Jul 25. 2024

나의 기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나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기도하고 있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초등학교 때 나는 공부를 못 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많이 맞았다. 매일 같이 아버지에게 혼나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스스로를 하찮은 바보라고 여기게 되었다. 물론 나도 공부를 잘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하는 방법을 몰랐고, 내 주변에는 공부를 잘 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약국에 취업한 이후 더 이상 시험을 치를 일이 없었다. 이제는 공부를 잘 하게 해달라는 기도제목을 바꿔야 한다는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공부'라는 말은 시험공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범위가 더 넓으면서 더 근본적인 단어를 찾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지혜'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지혜는 어두운 밤 같은 내 인생길에 바른 길을 비춰주는 등불 같은 존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인생에 정답이 없다지만, 가장 지혜로운 답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두 번째 기도제목은 가정을 화목하게 만들어달라는 기도이다. 엄마와 함께한 기억이 거의 없는 나는 늘 엄마가 그리웠고, 비정상적인 아버지로 인해 고통을 당할 때마다 평범한 아버지가 부러웠다.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잘난 것 하나 없는 어린 아이였던 내가 가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역기능가정에 순응하는 일이었다.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 자신을 보호하였다. 나의 뇌는 나의 나쁜 기억들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나는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처럼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강한 저항이 걸려있어서 기억해내려 애써도 엄마, 아빠와 함께 지냈던 추억들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이 망각은 심지어 최근 일까지도 지워버렸다. 역기능가정과 아무련 관련도 없는 기억들도 일년만 지나면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바보처럼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다. 특히 나는 나의 권리를 남들 앞에서 주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기 일수였다. 그런데도 나는 불만이나 억울함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좀 맹하고 멍청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로 그 멍청함이 나를 보호했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 기도에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응답해주셨다. 서울대 합격 이후 그 누구도 나에게 바보 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내 머리가 갑자기 좋아진 것도 아니고, 내가 완벽하게 시험 준비를 마친 것도 아니었다. 나의 서울대 합격은 하나님의 은혜가 분명했다. 점심으로 먹은 김밥 말고는 마치 거짓말처럼 모든 조건이 나를 위해 세팅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연이라기에는 그 우연이 너무 연달아 일어났다. 그리고 5개월만에 수능 점수가 90점 오르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기도만큼은 결코 응답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기도해도 우리집 형편은 더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나빠져만 갔다. 아버지는 무리하게 담보대출을 받아 유흥비로 탕진하셨고, 건강이 더 나빠져 병원에 입원하셨다. 동생이 태어나자 새어머니와 나와 관계는 급속도로 멀어졌다. 나는 다시 외톨이가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어른들에게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 화목한 가정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비록 아빠는 근면성실하지 않고, 나에게 다정하지 않았지만, 나만큼은 내 아들에게 근면성실한 아빠, 다정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 순간 은 나의 장래희망이 과학자에서 아빠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정말 흔하디 흔한 '아빠'라는 두 글자가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특별한 꿈으로 다가왔다.


 아빠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결혼부터 해야 했다. 아......결혼......나는 결혼만큼은 정말 자신이 없었다. 다시 수능쳐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가라고 하면 다시 도전해볼 것이다. 그러나 내게 결혼만큼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족을 이루는 것을 넘어 한 집안과 집안이 만나 결합하는 큰 행사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상견례부터가 막막했다. 엄마와 아빠는 이혼 후 20년 넘게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아빠는 조현병 환자에 알콜 중독자이다. 상견례장에 나는 누구와 함께 가야하는 것인지, 가서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막막했다. 나에게 딸이 있어도 우리 집안같이 다 망해버린 콩가루집안에는 주기 싫을 것 같았다. 예비신랑인 나는 잘못한 게 하나도 없지만 왠지 부끄러움을 느꼈다. 마치 내가 잘못한 것처럼. 내가 조현병 환자인 것처럼. 내가 알콜중독자인 것처럼. 상견례는 상상만 해도 진땀이 흐르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결혼을 포기했다. 그렇지만 부끄러워서 그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괜히 나만 더 속상해지고, 역기능가정이 내 마음을 찌른 상처가 벌어져 덧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좌절했고, 자존감은 떨어졌다. 이 사실을 모르는 주변사람들은 나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었다. 교회 자매들이 나를 보기 위해 약국으로 찾아왔다. 결국 나는 다 뿌리치지 못하고 친구가 소개해 준 초등학교 교사와 몇 번의 데이트를 즐겼고, 교회 자매와 잠시 사귀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는 모두를 속이고 있었다. 내 마음은 100% 진실하지 못했다.


  만약 내가 소년가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나에게는 부모가 없는 편이 차라리 더 행복할 것 같았다. 나 혼자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다. 엄마는 아빠와 할머니를 떠나라고 내게 조언해주셨다. 정말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엄마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귀가 솔깃했다. 그동안 굳게 닫혔던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피할 길이 있다는 안도감에 내 마음은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으며,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기쁨이 샘솟았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이었다. 새 가정에 행복을 채우기 위해 헌 가정을 무참히 깨뜨려야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엄마가 던진 돌멩이 하나가 내 마음을 요동시켰다. 그 누구도 공감할 수 없는,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갈등이 거센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나는 죽을 것 같았다.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나는 가정의 화목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가? 나는 계속 자책하며 고민했다.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포기하려고 할 때 마침 전국 청소년 수련회가 있어서 교회 청년들과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수련회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수백명의 학생청년들이 있었다. 은연중에 나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온 많은 청년 중 한 명쯤은 나의 가정환경을 이해하고 품어줄 수 있지 않을까? 더도 말고 딱 한 명만 있으면 되는데......'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착실히 다니는 여자만이 내 아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왔다. 나는 단순하게 교회를 착실히 다니면 신앙적으로 경건한 여자라고 보았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경건한 여자라면 당연히 누군가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희생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나의 단순한 사고방식과 초긍정적인 희망회로가 만나니 갑자기 그전까지는 보이지도 않던 가능성이란 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역교회별 모임을 할 때 한 자매를 알게 되었다. 그녀는 목회자의 딸이었는데 수련회기간동안 자신의 기도제목을 놓고 금식기도하는 중이었다. 나는 궁금해서 단도직입적으로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진로에 대해 고민 중이며 조만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도 나처럼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고등학교 시절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똑똑해보였고, 실제로 고등학교 성적도 우수했던 것 같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자신감이 생기고,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입시공부 분야는 그 당시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고, 나의 수능성적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나는 그녀에게 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공부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비록 내 이야기는 교회 수련회의 주제에 정확하게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나는 당당하게 그녀의 시간 안에 들어가 앉았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경청한 후 사색에 잠기는 것 같았다. 곧 그녀는 자신도 수능시험에 다시 도전할까 고민하고 있으며, 이번 수련회를 통해 말씀으로 응답받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녀에게 기도응답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성공했으니 당신 또한 해낼 수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수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았다. 한번은 그녀가 내가 근무하는 약국으로 퇴근시간무렵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마 내게 감사인사를 하러 온 것일 수도 있고,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싶어서 왔을 수도 있다.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약사로서 그녀를 맞이했고, 그녀 또한 내 뜻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수능시험과 대학생활은 더이상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의 관심사는 가족이었고, 그 가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신앙생활이었다. 나는 당장 이 문제 속으로 번지점프할 수 있는 자매를 찾고 있었다.


  수련회 마지막날 프로그램 중에 세대별 맞춤강의가 있었는데, 이 시간은 중고등부와 대학/청년부가 나뉘어져서 각각의 강사에게 특강을 듣고 토론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당시 농심에서 상무로 근무하셨던 사랑빚는교회 이정근 집사님께 '신앙생활도 탁월하게 업무도 탁월하게'라는 제목의 특강을 들었다.


  예수님을 믿은지 얼마 안 된 나는 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특강이 끝난 뒤 강사님을 찾아가 명함까지 받았다. 강사님이 떠나신 후 청년들은 함께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들의 고민은 주로 진로와 돈에 관한 문제였다. 당시 나는 사회초년생으로서 약국에 취업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로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오직 헌금에 대해서만 이따금씩 내 의견을 피력했다. 나는 왜 십일조를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는 것은 상당한 심적 고통과 경제적 리스크를 동반하는 일이라고 주장했으며, 내가 헌금한 십일조의 사용처에 대해 내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지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이야기 도중 나는 현금이 없어서 카드론으로 30만원을 대출받아 십일조를 낸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내가 대출, 이자 같은 경제적 개념에 무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둥글게 모여앉은 청년 무리들 사이에 유독 내 눈에 띄는 자매 한 명이 있었다. 그 자매는 약간 통통한 몸매에 상하의로 초록색 삼선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으며, 오똑한 콧날 위로 은빛으로 빛나는 눈화장이 인상적이었다. 그 자매에게서 느껴지는 경험치와 실패를 통해 체득한 올곧은 분위기로 볼 때 분명 내 나이 또래일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그 자매가 토론 시간에 어떤 내용을 이야기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은 단기 선교를 떠나기 위해 직장을 담대하게 그만두었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녀를 지켜주셨다는 이야기이다. 


  발표할 때 그녀는 더 멋있어보였다. 그녀는 아나운서처럼 발성이 좋고 발음이 또렷했고 무엇보다 서울말이 자연스럽고 유창했다. 한 번도 그 자매와 대화한 적은 없었지만, 목마른 자가 목마른 자를 알아보듯 그 자매 또한 나처럼 세상풍파를 겪고 하나님 안에서 살 길을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우린 수련회에서 잠시 스쳐지나가지만, 만약 우리가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평택 무봉산 청소년 수련회의 대망의 마지막 시간은 이재기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파송 예배였다. 목사님께서는 설교 마지막에 신학교에 헌신할 학생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설마 굳이 그런 데 갈 학생청년이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학생들이 손을 번쩍 들고 주님께 삶을 헌신하겠노라 서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들을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그들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면 드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잠시 고민해보았다. 물론 나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신학생들의 헌신에 공감할 수도 없었다. 다만 내가 수련회 기간동안 확신한 것은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존재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약국 입사후 몇개월동안 엄마와 아빠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수련회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아버지를 버리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대구를 떠나 원주로 도망친 상태였다. 만약 내가 아버지를 버리고, 어머니를 선택한다 해도 내 앞에서 대놓고 나를 욕할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엄마쪽에 서는 게 훨씬 더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내 삶 속에 개입시키자 나는 전과 같은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하나님께 항복했고, 엄마와 아빠 둘 중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기로 결론내렸다. 나는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를 결코 버릴 수 없었고, 할머니가 사랑하는 아들인 아빠를 버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군 제대 이후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엄마 또한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 두 분을 한꺼번에 모시기로 작정했다. 


  조약사님께서는 내게 주일학교에 교사로 헌신할 것을 권하셨고, 나는 기도 끝에 그 제안에 수락하여 2010년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헌신하였다. 나는 주일학교 교사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어린이전도협회에서 진행하는 'TCE(Teaching Children Effectively)'교육과정에 등록했다. 나는 한달동안 약국업무가 끝나자마자 어린이전도협회로 달려가 목사님의 강의를 들었다. 목사님의 진심이 담긴 말씀과 복음을 향한 뜨거운 열정은 나에게로 전염되었고, 나에게도 정말 기적 같은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내가 신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2월이 되었을 때 나는 청년부예배시간에 처음으로 신학교에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을 고백했다. 신학교를 향한 내 마음이 변하니 제임슨 형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게 되었다. 제임슨 형제는 필리핀의 한 목사님 아들인데 필리핀에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한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형제였다. 예전에는 제임슨 형제를 그저 불쌍한 필리핀 유학생으로 보았었는데, 이제는 미래의 필리핀 신학교 총장이 될 귀한 형제 제임슨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나 또한 제임슨처럼 신학교에 가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싶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일꾼이 되고 싶었다. 나를 통해, 나의 가정을 통해, 나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었다.


  조약사님은 예전부터 내게 이런 말씀을 종종 하셨었다. "성경공부하려면 신학교에 가야 한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조약사님이 아니었다. 나의 고백을 들은 조약사님께서는 망설임없이 내게 당장 이번달 말부터 시작되는 M.Div 과정에 바로 등록할 것을 권면하셨다. 내게 전액장학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정말 신학교에 갈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지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고,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으며, 무엇보다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나같은 사람이 신학교에 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신학교에 간다고 생각하고 두렵고 떨렸다. 다행히 조약사님께서 월요일, 금요일, 토요일 오전에 내가 파트타임으로 근무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셔서 매달 140만원 정도는 벌 수 있었다. 그러나 신학교에 가게 된다면 친구들과의 술자리, 소개팅, 여행, 볼링과 탁구 같은 취미활동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게 된다. 나는 당시에 내게 닥친 이 현실을 또 하나의 고난으로 받아들였다.


  신학교는 내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고난이었던 것이다. 나는 구약성경에서 욥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보려했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들고 가슴만 아파왔다. 약국을 그만두기 위해 매니저약사님께 말씀드리자 약국 사람들도 나의 신학교행을 반대했다. 채약사님은 특별히 시간을 내어 내게 찾아와 본인의 친구 이야기까지 하시면서 내게 시간 낭비하지 말 것을 조언해주셨다. 심지어 담임목사님께서도 소명도 받지 못한 초신자의 섣부른 선택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어머니께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다. 반대하실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약국에서 입학원서를 쓸 때 한 가지 에피스드가 있었다. 내가 입학원서를 작성할 때, 조약사님의 아내인 진약사님께서도 신학교에 가기 위해 입학원서를 내 옆에서 작성하고 계셨다. 진약사님은 내게 꼭 M.Div과정에 지원할 필요가 없으면 본인이 지원하는 M.A.과정도 괜찮다고 말씀해주셨다. M.A과정은 월요일에만 신학교를 가면 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훨씬 부담이 적었다. 나는 지우개로 M.Div과정칸의 체크표시를 지우고, M.A.  과정에 체크했다. 


  잠시 후 조집사님이 오셔서 내 입학지원서를 검사하셨는데 M.A.과정에 체크되어있는 것을 보시고 그 이유를 물으셨다. 나는 진약사님께서 추천하셨다고 대답했다. 조집사님은 바로 아내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셨다. 왜 박약사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서 M.A.과정으로 바꾸게 하냐고 막 혼내셨다.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는 진약사님을 보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조용히 지우개로 M.A.과정의 체크표시를 지우고, 다시 M.Div과정에 체크 표시했다.


  약국에서 일반약 업무를 일주일간 인수인계한 후 나는 약국을 퇴사했다. 3월부터 나는 정직원이 아니라 파트타임 약사로 근무하게 될 터였다. 드디어 신학교로 가기 위해 차를 끌고 나왔을 때 제임슨으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신학교에 가면 예배를 드리는데, 그 때 꼭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어야한다고 제임슨은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차를 후진하다가 그만 전봇대를 박고 말았다. 뽑은 지 1년 조금 넘은 나의 애마 포르테의 엉덩이가 움푹 파였다. 그 순간 신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금세 생각을 고쳐먹고, 그 차를 끌고 바로 신학교로 향했다. 이 때 욥기를 읽었던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일에만 힘쓰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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