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닌 신학교는 아주 작고 아담한 건물이었다. 나는 긴장하는 마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작은 강의실 안에는 먼저 온 학생들이 앉아있었는데 열 명도 되지 않아보였다. 나는 어렵거나 집중하기 힘든 과목을 수강할 때마다 교수님 바로 앞 자리에서 공부하던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맨 앞자리에 공석이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다행히 맨앞자리에는 여학생 한 명만 앉아있을 뿐 나머지 자리는 모두 공석이었다. 나는 그 여학생에게서 세 칸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자리잡고 노트북을 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여학생의 낯이 익었다.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신학생들과 나의 접점은 오직 전국 청소년 수련회 밖에 없었다. 맞다! 세대별 맞춤 강의에서 만났던 바로 그 자매, 은빛 눈화장이 인상적이었던 그 자매였다.
한달 후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그 자매를 또 만나게 되자 내 심장이 약간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의 연속적인 만남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나의 착각일 가능성이 더 컸으며,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도해도 나는 당장 무슨 액션을 취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신학 수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교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나는 굉장히 긴장한 상태였다. 급속도로 피곤해진 나는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교수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셨고,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나의 수준을 알아보기 위해 정말 쉽고 간단한 주일학생용 질문을 신학생인 내게 던지셨다.
"성경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죠."
"아......"
이 질문 하나로 나의 영적 수준이 다 드러났다. 나는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 신학교에 왔으니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 주신 교수님께 감사드렸다. 신학교 수업 첫날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는 신학교 과정을 통해 나를 철저하게 낮추셨는데, 이는 나로 하여금 갈림길 앞에 섰을 때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게 만들었으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만들었다.
신학교의 첫학기를 다니는 동안 아버지께서는 또 사고를 쳤다. 아버지는 할머니의 집을 유흥비로 다 탕진하신 뒤에 할머니께서 비상금 1500만원으로 마련하신 전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또 다시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세를 담보로 무리한 대출을 받았고, 노래방에도 외상값 500만원을 빚진 상태였다.
아버지의 빚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모와 고모부께서 나를 대구로 부르셨다. 나도 이제 나이도 서른 가까이 먹었고, 약국에 취업한 사회초년생이었기 때문에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와 아버지를 책임지고 부양할 의무가 있었다. 친척 어른들은 나에게 아버지와 함께 할머니를 책임질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할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는 비용까지 내가 감당하길 원했다. 대신 고모부께서는 힘 있는 지인을 동원해 노래방 외상값을 300만원 정도로 깎아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가족 모두를 사랑으로 섬기고 싶었다. 나는 모든 의견을 수용하고, 진심으로 내 한 몸 희생하여 가족을 보살피리라 다짐하였다. 그러나 신학생 신분으로 할머니와 아버지의 병원비를 모두 감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보였다. 나는 용기를 내어 고모부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제가 아버지를 책임질테니, 고모와 고모부는 할머니를 책임져주십시오."
나는 각자의 부모를 부양하자고 말한 셈이었다. 고모부는 흔쾌히 내 의견에 동의했다. 원주로 돌아간 나는 아버지의 대출금과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단 적금을 깨고, 모든 보험을 해지했다. 내가 가진 모든 자산을 모아보니 신기하게도 아버지의 대출금에다 노래방 외상값을 합친 금액과 거의 일치했다. 아버지의 신용상태가 좋지 않아 대출을 많이 받지 못한 것이 정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때마침 하나님께서는 마산의 강성기 목사님을 원주 교회로 보내주셨다. 강성기 목사님은 알콜중독자들의 재활과 사회 복귀를 위해 일하시는 귀한 분이셨다. 나는 아버지를 모시고 마산으로 가서 강목사님과 상담한 후 아버지를 그곳에 부탁드렸다. 원주교회 정목사님과 조집사님께서 힘써 주신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분들 덕분에 나는 가까스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기어나올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어머니께서 원주로 올라와 나와 같이 살길 원하셨다. 평소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던 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응답하심으로 여겼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아파트에서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하셨다. 나는 돈이 한 푼도 없는 거지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요구를 거절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염치 없지만 나는 조집사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는 조집사님께서는 내게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셨다. 덕분에 나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동시에 어머니와 함께 교회도 다닐 수 있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부모님의 거취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을 준비할 타이밍이었다. 상견례와 결혼식을 상상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사고치는 장면이 떠올랐지만, 지금까지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이 또한 지켜주시리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 당시 내게 가장 시급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나의 신부를 찾는 일이었다. 나는 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나와 함께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배우자를 얻고 싶었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잘 믿는 자매라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약간의 기대를 하면서 매일 하나님께 좋은 배우자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학교 다니는 내내 나는 너무 바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늘 수면부족, 만성피로,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월요일에는 하루 종일 약국에서 바쁘게 일했고, 월요일 밤 늦게부터 목요일 저녁까지 신학교에서 공부와 과제에 파묻혀 있다가, 또 다시 약국에서 금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2시까지 근무했다. 토요일 2시부터 일요일 저녁까지는 신학생으로서 교회 모든 예배와 행사를 섬겨야만 했다.
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은 정말 단 한 시간도 없었다. 나는 전도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었다. 나는 신학교를 다니는 특이한 약사 성도에 불과했다. 나는 돈 버는 약사, 공부하는 신학생, 섬기는 성도 그리고 집안의 가장 역할을 모두 감당하느라 정말 매일매일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처럼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전국 청소년 수련회에서 처음 만났던 그 서울자매가 병원까지 차를 태워줄 형제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도서관에 있던 나는 몰래 기숙사로 도망쳐 숨어 있었다. 그리고 서울자매가 다른 전도사의 봉고차를 타고 학교를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스스로가 지금 옹졸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째로, 나는 여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병원에 다녀오면 두 시간은 그냥 지나갈텐데 그것은 당시의 나에게 는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하는 감당하기 힘든 출혈이었다. 둘째로, 나는 나와 아무런 사이도 아닌 여자를 내 차에 태우기가 부담스러웠다. 그 자매는 나보다 신학교에 한 학기 일찍 입학한 선배일 뿐이었다. 그녀는 내 친구도 아니었고, 같은 교회 성도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그냥 81년생, 나는 빠른 82년생으로 서로 애매한 사이었다. 신학교에 82년생이 훨씬 더 많아 내가 82년생들과 서로 친구처럼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서울자매에게 어쩔 수 없이 '선배'라고 한 두 번 불러보았을 뿐, 그녀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학교 선배 가운데 81년생은 대전형제, 서울자매 이렇게 딱 2명이었다. 어느날 나는 급하게 오느라 와이셔츠를 깜빡 하고 왔다. 때마침 기숙사에 있었던 81년생 대전형제에게 나는 다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님 와이셔츠 좀 빌려주세요."
그러자 대전형제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차피 생일도 몇 달 차이 안 나는데 편하게 얘기해."
"그럴까?"
그날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대전형제와 친구가 되었다. 나는 81년생을 배신하고 82년생에게 붙었다가 다시 81년생에게 붙은 까마귀였다. 나의 이중적인 태도는 81년생과 82년생 모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나는 애초부터 신학교에 성경공부를 하러 왔을 뿐, 신학교에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이다. 신학생들 또한 초신자였던 나에게 관용을 베풀어주었고, 오히려 나에게 착하게 대하고 격려함으로 신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목요일, 모든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막 자동차를 끌고 나오던 참이었다. 그 때 마침 서울자매 또한 짐을 챙겨 나왔고, 우리는 약간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 때 서울자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태평리까지 나 좀 태워줄 수 있어?"
"......"
"거기 버스정류장까지만 좀 태워줘."
"네. 타세요."
다행히 태평리 버스정류장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자동차로 2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서울자매가 들고 있는 짐을 보니 갑자기 그녀가 안쓰러워보였다. 그 때 처음으로 나는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대전형제와도 말을 트고 지내는데, 대전형제와 동갑인 서울자매에게만 "선배"라고 부르는
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엑셀을 밟으면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근데 저 대전형제와 말 트고 친구하기로 했어요."
"아......그래?"
내 옆자리에 앉은 서울자매는 내 말을 듣고 처음에 약간 아니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그 표정은 황당함으로 변했다. 그녀는 체념한 듯이 한 숨을 쉰 뒤 나를 쳐다보았다.
"알았어. 이제 OO라고 불러."
"어......"
"차 태워주니까 봐줄게."
나는 서울자매의 화끈한 성격에 약간 놀랬다. 그리고 이제 모두와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첫학기도 후반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에게는 정말 매일매일이 전쟁 같았다. 월요일 저녁만 되면 학교에 가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요일 저녁만 되면 학교를 중퇴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야 할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써야 할 보고서들이 밀려있었다. 나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마산의 알콜중독치료센터 겸 교회인 사랑샘교회를 탈출했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대구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기사님이 버스표를 검사하자 돈이 없어 표를 구하지 못한 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위독하십니다. 꼭 가야합니다."라고 거짓말했다. 마음이 약해진 기사님은 아무 대가 없이 아버지를 대구까지 태워주었을 것이다.
그 주 월요일 저녁에 나는 신학교로 갈 수 없었다. 나는 대구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를 찾아내어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다. 아마도 아버지는 몇 주간 아니면 몇 달간 처방약을 제대로 먹지 않은 상태일 것이었다. 그럴때 조증과 우울증이 번갈아서 나타나는데 조증인 경우가 더 위험하다. 조증이 심한 경우 아버지는 병원을 탈출하거나 스스로의 몸을 해한다. 자해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있는데, 아버지는 지금까지 냉동고, 본드, 수면제, 칼을 자해에 사용하였다. 나는 이를 통해 냉동고는 신체를 얼려죽일 수 있고, 본드는 눈에 넣을 경우 망막을 녹일 수 있고, 수면제는 과량 복용시 호흡 곤란이 오며, 칼은 남자의 성기를 잘라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렵게 아버지와의 통화에 성공했다. 아버지는 친구네 집에 머물고 있다고 하셨는데 만나보니 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본인이 정상인으로 보이기 위해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어딘가는 구멍이 꼭 생겼다. 그 구멍은 아버지가 과대망상자임을 구급차요원, 병원직원들에게 확인시켜주었다.
나는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대구가정법원을 들락거리며 아버지를 한정치산자로 만들었다. 판사님은 할머니께서 치매임을 확인하신 후 아버지의 보호자로 나를 지정하셨다.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었고, 아버지는 미성년자와 비슷한 한정치산자가 되었다. 나는 큰 도움이 될 거라 기대했지만, 들인 공에 비해 효과가 미미해 억울했다. 슬프게도 아버지를 한정치산자로 만든 것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