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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지박약사 Jul 11. 2024

조약사님의 일대일 트레이닝

  어느 날 조약사님(약국장님)은 내게 프랭클린 플래너를 구입하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듣는 생소한 단어라서 나는 정확한 이름을 다시 여쭤보았다. 그러자 조약사님은 나를 약국 컴퓨터 앞에 앉히시고, 몸소 인터넷 쇼핑까지 도와주셨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여러가지 버전이 있었는데, 나는 초보였기 때문에 스타터팩을 선택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약국장님께서 이 다이어리를 사주시고 싶어서 나를 의자에 앉히셨다고 생각했다. 조약사님께서 그 다이어리를 약국 업무에 꼭 필요한 도구라고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조약사님께서는 내 머릿속을 읽으시는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전에는 내가 프랭클린 플래너를 직접 사서 근무약사들에게 선물했었어. 그런데 자기 돈으로 안 사니까 귀한 줄 모르더라고. 있어도 사용을 하지 않는거야. 그래서 너는 안 사주기로 결정했어. 네 돈으로 사."


  나는 약간 섭섭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사주시면서 왜 나한테만 유독 야박하게 구시는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조약사님은 내가 모르는 여러명의 사회초년생 약사들을 대상으로 일대일 트레이닝을 실시한 경험이 있는 것 같았다. 거기서 터득한 노하우 중 하나인 '프랭클린 플래너는 자기 돈으로 구입하는 게 더 효과가 좋다.'를 내게 적용하셨다고 난 믿었다. 프랭클린 플래너는 내 평생 처음 보는 두껍고 복잡한 다이어리였다. 조약사님에 따르면 비싼 가격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는 이 다이어리를 나는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나는 단순하게 시간대별로 매일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시행여부를 체크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약 이름과 위치를 외웠다. 약의 이름을 보면 대강 효능이나 성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다빈도 처방의약품들은 약의 이름과 성분 뿐만 아니라 약의 포장단위, 약의 위치까지도 자연스럽게 외워졌다. 그러나 모든 약의 위치를 정확히 외우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약을 조제하기 위해서는 처방전에 적힌 약의 이름을 보고 약장에서 약을 바로 찾아와야 한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피크타임에 약의 위치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굉장히 난감한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약의 위치를 다 외울 수 있을지 나는 고민했다. 약의 위치는 혈압약, 당뇨약, 고지혈증약, 진통제, 안약, 연고, 냉장약 등의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을 뿐, 약 이름을 듣고 바로 찾을 수 있는 논리석 인과성은 약했다. 결국 나는 무식한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포스트잇을 사서 약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그리고 출입문을 기준으로 원룸을 조제실로 상상하면서 벽면에다 약 이름이 적힌 포스트잇을 붙였다. 약포장기계가 있는 곳에는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계란판을 올려두었다. 30구 계란판을 약품 투입구라고 생각하고 30개의 알약을 각각의 구에 한 알씩 올려놓는 연습을 했다. 한장씩 붙이다보니 어느새 온 집안이 알록달록해졌다. 나는 아침과 저녁으로 약국 조제실을 상상하며 30분씩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약국 근무가 끝나면 저녁 식사를 한 뒤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 초등학교에 가서 운동장을 달리거나,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는만큼 했다. 나중에 같이 근무하는 박약사님이 농구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농구연습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나온 학부모님들은 혼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젊은이를 신기하게 쳐다보시기도 했다. 그 중 한 분은 내게 어린 나이인데도 벌써 건강관리한다며 날 칭찬해주셨다. 퇴근 후의 운동은 하루종일 사람들 눈치보며 쌓인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풀어주었고, 내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저녁 8시 쯤부터 나는 매니저약사님이 내 준 과제를 했다. 주로 약의 모양, 성분, 효능, 최대 용량, 부작용, 특이사항에 대한 자료를 보기 편하게 정리하는 과제였다. 처음 몇 주는 공부할 분량이 많아서 새벽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모든 성분을 다 외워야한다고 생각하니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모든 성분을 다 외울 수도 있고, 외울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약에 대한 암기보다는 처방전에 그 약이 나온 이유가 더 중요했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으니 하루 2시간 정도면 모든 과제를 끝낼 수 있었다.     

  

  입사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조약사님은 내게 '일본전산 이야기'라고 적힌 빨간 책을 한 권 주셨다.


  "자, 선물이다."

  "감사합니다. 약사님."

  "이 책 다 읽고 독후감 써 와. 한 쪽으로."

  "......네. 알겠습니다."

  

  조약사님은 이 책을 통해 내게 태도의 중요성을 가르쳐주셨다. 일본전산이 직원들에게 강조하는 세 가지 구호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내게 좋은 지침이 되었다. 

  

  1) 즉시 한다. 

  2) 반드시 한다.

  3) 될 때까지 한다.

  

  약국에서 한달간 일해본 결과 서울대 졸업과 일의 능률 사이에는 유의미한 상관성이 없었다. 약국업무의 목표는 '대기시간 10분 보장제'였다. 쉽게 말해 모든 고객이 처방전을 접수한 뒤 10분 이내에 조제된 약을 받으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산약국의 목표였다. 하루 수백장의 처방전을 빠른 시간 내에 다 처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팀워크였다. '대기시간 10분 보장제'는 절대 혼자 해낼 수 있는 미션이 아니었다. 오직 전산팀, 테크니션팀, 약사팀이 한마음 한뜻으로 1) 즉시 하고, 2) 반드시 하고, 3) 될 때까지 해야만 성공가능한 미션이었다.  

  

  나의 한 페이지 독후감을 받으신 조약사님은 내게 두꺼운 책 한 권을 또 선물해 주셨다. 내 평생 그렇게 두꺼운 책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난 제목을 보는 순간 굉장히 유명한 책일 거라고 추측했다. 책의 제목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었고, 책의 저자는 스티븐 코비였다. 조약사님은 이 책을 챕터별로 읽고, 또 보고서를 작성해보라고 명령하셨다. 

  

  "이 책 굉장히 훌륭한 책이야. 읽어보면 네 인생에 꼭 도움이 될거야."

  "네....... 감사합니다. 약사님."

  "진짜야. 나도 이 책 읽고 많이 배웠다. 독후감 잘 쓰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두꺼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나는 약국 업무를 익히고, 약을 공부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했다. 심지어 약국 매니저약사에게 하도 혼이 나서 책을 쳐다볼 정신적 여유 따위가 전혀 없었다. 이런 나의 사정을 조약사님께서는 다 아시고 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약사님께서는 이 책이 험한 세상에 첫발을 내딛은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판단하셨기 때문에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을 내게 건네셨다. '일본전산이야기'에서 무조건적으로 보스의 명령에 충성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배웠기 때문에 책을 거부할 수가 없었고, 될 때까지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독후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챕터씩 읽고 독후감을 제출했다. 2달 이상 걸린 것 같다. 처음에 읽을 때는 내 식견이 짧아 코비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읽어내지 못했다. 이책은 그저 수많은 자기계발서 중에 한 권, 그리고 수습기간에 주어지는 여러가지 과제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수능 공부와 대학 공부를 성공적으로 마친 경험은 나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여러번 읽으면 읽을수록 그 뜻이 새롭게 다가오는 인생 교과서 같은 책이었다. 내 마음이 초심을 잃고 방황할 때,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만나 두려울 때, 내게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할 때마다 나는 책장으로 가 이 책을 꺼내들었다. 그럴 때마다 코비는 내게 질문했고, 나는 코비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했다. 코비는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와 함께 구체적인 실천을 내게 요구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코비의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래도 코비의 가르침 중 내게 꼭 필요하다고 깨달은 부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고, 될 때까지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눈물로 씨를 뿌리면 언젠가 기쁨으로 열매를 수확하리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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