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픽션 : 논픽션
카메라로 담아내는 모든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 사이를 바쁘게 오간다. 그중 다큐멘터리는 뭔가 더 부산스럽다. 실로 변화무쌍해서 한 번은 추리 소설 읽듯이 바지런히 어떤 행적을 좇고, 때로는 그저 가만히 말들의 말을 듣는다. 자는 아기의 정수리에 촘촘히 난 솜털을 간질이듯이 숨죽이면서.
특히, 인물 다큐멘터리의 경우 인터뷰만으로도 주인공의 뒷모습 앞모습을 조명한다. 그러다 자연히 그이를 내내 둘러싸고 있던 시대가 전면에 등장한다. 시작되자마자 끝나버린, 공기처럼 흩어진 시절에 확성기를 갖다 댄다. 어떤 도시에서, 어떤 해에, 어떤 계절에 누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던가? 잃어버렸던가? 그러면 관객은 어느새 사방에 늦가을 낙엽처럼 흩어진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주워 담고 있다. 뒤숭숭하고도 심란한 마음으로 돌아보면서, 뭔가 불쾌하면서도 애틋하니 대체 이건 뭘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이렇게 이 세계 안에 한동안 머물고 있자면, 자연히 무언가 쓰고 싶어 진다. 평소 굳어있던 손마디 관절이 슬금슬금 움직여 메모하고 있다. 허구와 실화 사이서 터져 우수수 쏟아지는 별 사탕을 주우면서.
물론, 필자는 이번 달도 하염없이 뭉그적거리다 쓰기와 한참 멀어져 있었다. 손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이 와중에 단비 같은 다큐 하나를 발견했는데, 뭔가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가 않다.
제목만 보고 무슨 미제 사건을 다뤘나 했지만, 무성 영화 시대 필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의 미장센이 나름의 소재를 따라가는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무성 영화와 닮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우선 프롤로그부터 눈앞에 김이 서리는 흑백 사진 하나로 시작된다. 길고 긴 설산 위로 거대한 봇짐을 진 사람들이 점처럼 박혀 있다. 대체 저 많은 사람이 짐을 이고 단체 등산을 온 건 아닐 테고, 저게 뭔 일인가 어안이 벙벙한 사이 영화가 시작된다.
때는 바야흐로 1900년대, 너도나도 금광을 찾아 떠돌던 황금광 시대, 캐나다 깊은 산골짜기에도 길이 놓이고, 마을이 생기고, 사람들은 짐을 이고 산을 오른다. 시간이 점점 더 지날수록 골목이 생기고 펍이 생기고 여관이, 극장이 생기고……. 그 와중에 재생되는 느리고 둔탁한 사운드 트랙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듯이 흑백 이미지와 함께 계속된다. 이 웅장하면서도 느린 음악에 취하지 않으려 나름 애쓰며, 서서히 드러나는 이야기에 집중해 봤다.
우선 본격적인 이야기는 무성영화 시대 필름의 원자재로 시작된다. 초기 필름은 화약을 만드는 방법과 비슷해서 이름부터가 질산 필름으로, 질산과 황산을 면직에 합성해 만들었다. 그런 탓에 조금만 조건이 맞아떨어져도 불이 붙었다는데, 이쯤에서 어느 정도 과장이 아닌가 싶었지만, 곧 화면 한가득 지역 신문기사가 뜬다.
그 시절, 자선 바자회나 서커스 등에서 터진 대형 화제에 항상 이 필름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후로는 발화성을 보완한 필름이 발명되기도 했지만, 기존 게 워낙 저렴해서 유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널리 쓰였다. 이렇듯 꽤 흥미로운 배경이 오프닝을 수놓지만, 쉽게 빠져들기는 어렵다. 말 그대로 아카이빙을 병풍처럼 펼쳐 놓는 구성으로, 생전 들어 볼 일 없을 도슨 시티의 상점들의 이름과 구겐하임 가문이 도슨 시티의 금광을 사들였다는 등의 기사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점점 더 마을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가짓수를 늘려가는 상점과 혹은 마을 회관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방문한다는 공지 같은 기사로 연결된다.
아니, 근데 무려 1930년대 마을 회관에 실내 수영장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슬슬 피로가 몰려온다. 이쯤에서 잠시 한눈이라도 팔면 그대로 수면 마취인데, 그나마 중간에 삽입되는 무성영화 클립들이 희뿌연 분위기를 환기해 준다. 그렇다고 너무 기대는 마시길, 정신이 도로 말짱해질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무성 영화의 속도는 그간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감각과는 그 궤가 다르다. 수원지에서 오는 유속부터가 다르다고 할까? 어쩌면 무성영화를 본다는 건 이미 사라져 버린 어제의 세계에서 모스 신호를 어림짐작하는 것 같다. 그러니 딱히 어떤 기대를 놓고 본다면, 그만의 재미가 있다.
혹자는 그럴 바에야 어떤 효용이나 의미가 있나 반문하겠지만, 그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시대가 1900년대였다. 기차가 달려가는 자료 화면만 보고도 놀라고 팔짝 뛰는 관객의 눈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모든 걸 새로 접하는 아이의 눈처럼, 그쪽으로는 해맑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매표서 앞에서 줄지어 새 영화를 기다렸다.
문득 기차를 안 본 눈을 사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무언가를 봐도 새로 놀라고 감탄하는 눈으로 다시 영화를 보고 싶다. 어쩌면 감각이란 것도 그 시대의 흐름에 길드는 거로 생각하니, 무성 영화가 물에 불린 면발처럼 느껴지는 건, 어떤 시차 때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째 그날은 용케 버텨서, 무사히 다큐 후반부에 다다랐다. 이제 1930년대도 2020년처럼 끝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는 단순히 사진이 움직이는 일로 즐거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1939년, 도로시가 오즈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서 바뀌는 ‘테크니컬러’로 화면 전체가 바뀌던 때, 이제 영화는 온갖 소리와 색들로 가득 차 있다.
이즈음 산골짜기 도슨 시티에도 유성 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곧 무성영화 필름은 애물단지가 된다. 아니 애물단지도 높게 쳐준 바, 마을에서 수년간 상영됐던 필름들은 그저 흐물거리는 쓰레기로 전락했다. 당시 마을의 네거티브 필름들은 도서관과 마을회관, 혹은 은행에 나누어 보관되었는데, 그간 도슨 시티로 오고 가는 필름의 유통을 책임지던 은행장은 이 필름을 도로 거둬 갈 의향이 있는지 영화사에 기별을 넣는다. 물론, 영화사 측의 대답은 알아서 폐기하도록 하시게였다.
결국, 이즈음 도슨 시티의 무성 영화 필름들은 차례로 폐기된다. 먼저 산채로 불태우고, 이도 역부족이자 아예 돛단배처럼 강가에 띄워 버린다. 그러고도 용케 살아남은 필름은 산채로 묻혔는데, 바로 이 생매장당한 필름을 이야기하기 위해 두 시간 가까이 숙취 같은 진행을 견뎌왔다! 드디어 마지막 몇십 분을 남겨두고, 극 초반에 잠시 등장했던 노부부가 다시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 두 사람은 캘리포니아 아카이브 연구원으로, 평생 오래된 필름을 발굴하고 보존하는 일을 해왔다. 그 덕에 평상시에도 버릇처럼 공룡의 뼈를 발견하는 고고학자처럼 자주 땅바닥을 보면서 다녔는데, 그러던 1978년. 우연히 얻은 작은 단서 하나로 뜬금없이 캐나다 도슨 시티로 날아간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전에 극장 터에서 땅바닥을 파보던 와중에, 곧 구두코에 필름이 차였다.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니고, 곳곳에 지뢰밭처럼 사방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게 여전히 발화 가능한 질산염 필름이라는 것. 간신히 모두 파내긴 했는데, 어떤 업체도 이 작은 폭탄들을 통째로 옮겨주려 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한동안 필름은 그대로 발이 묶여버린다. 다행히도 군부대에서는 이런 발화성 물질을 옮기는 수송 비행기가 있었고, 결국 미군 화물 수송기로 필름 전체를 국립 아카이브 연구소로 실어온다. 이때 실려 온 수백 통의 필름들은 놀랍게도 대부분 재생이 가능했는데, 다만 오랫동안 얼음 밑에 묻혀 있던 탓에 그만의 고유 표식을 갖게 됐다.
실제 도슨 시티 아카이브 필름을 재생하면, 필름 중앙이나 주변부에 마블링 같은 물 얼룩이 번져 나온다. 그래도 감상 자체를 방해할 정도가 아니고, 어찌어찌 고풍스러운 특수효과처럼도 보인다. 낡은 사진의 엷은 그을림처럼도 보일 뿐, 필름 속 배우들의 얼굴만은 불꽃처럼 환하니 선명하다.
생각해보면, 카메라가 발명된 이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꽤 단시간에 도시에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극장이 생겼다. 도슨 시티 주민 역시 그 어떤 지역보다 열심히 영화를 관람했다. 다만 중심부에서 상영된 신작이 2~3년 시차를 두고 들어왔는데, 아마 영화광들은 좀이 쑤셨으리라. 외지인들의 입으로 신작의 제목이나 대강 누가 나오는지 전해지는데 정작 개봉을 안 하니 이거 참 난감했겠다. 그래도 잊을만하면 마을 회관 공지에 새 포스터가 나붙고, 너도나도 매표소 앞에 줄을 섰겠지. 매표원에게 손가락 마디만 한 표를 끊고, 극장 안으로 들어선 마을 주민들의 상기된 얼굴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어떤 영화광은 이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론 미루고 미루다 마침내 본 무언가가 더 진귀하고 애틋한 법이니, 가끔 시차라는 게 그런 거니까.
순간 이런 생각도 들었다. 당시 극장에서 관객석 사진을 남겼으면 어땠을까? 극장 자체 새해 가탈 로그용 사진으로 시리즈로 찍어 가지고 있었다면, 정말 멋진 아카이브가 됐을 텐데! 정말 그런 흑백 사진을 찾아서 도록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타임머신일 텐데 아쉽다. 어쩌면 방대한 샌프란시스코 아카이브에 일부 자료가 있을 수도?
이런 잡다한 생각으로 계속 옆길로 새다 보니, 어느새 이 긴 여행의 끝에 다다랐다. 이렇게 인고의 시간 끝에 마지막에 다다르니, 꼭 중년이 되어서 어린 시절 봤던 필름 일부를 모아 붙여 보는 주인공이 된 것 같다. 그렇게 영사기에 희뿌연 얼룩이 점처럼 찍힌 릴들이 돌아가는 동안,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도슨 시티에서 상영됐던 영화들이 몰아치듯이 끝을 장식한다.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불꽃같은 얼굴들 형형이 빛나면서.
- barries of society (1916)
- bread(1918)
- the stolen paradise(1917)
- the recoil (1917)
- the unpardonable bin(1916)
- brutality (1912)
- good fortune(1912)
- the half breed(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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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영원할 줄 알았던 황금광 시대도 끝이 났다. 한때 금광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던 사람들도 떠나고, 상점가 곳곳이 문을 닫기 시작한다. 도슨 시티에서 가장 사랑받던 마을회관 극장마저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이즈음 마을회관 내 체육관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한다. 이때까지 체육관은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쓰이고, 겨울에는 하키장으로 쓰였는데, 이제 하키 전용으로만 쓰도록 용도 변경하려는 차였다. 이제 마을 소년들은 임시로 생기던 울퉁불퉁한 얼음판 대신 매끄러운 스키판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이때 하필, 이즈음 불에 타버린 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던 필름들이 마을 회관으로 넘어왔다. 이에 수백 박스에 달하는 릴을 처리할 경황이 없었고, 결국 인부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영장이던 구덩이 안에 필름을 모두 쏟아부었다. 그렇게 그대로 마감처리를 했고, 그렇게 필름을 품은 하키장이 탄생한다. 이런 다소 엉뚱한 사연이 끝나고, 마을에 떠도는 작은 비화 하나가 덧붙여진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미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밑에 뭐가 묻혀 있었는지요.
당시 하키장을 이용하던 학생들 말로는,
그러니까 봄이 되면 얼음판이 조금 녹잖아요?
그러면 꼭 표면에 필름 일부가 드러나는데,
바로 그걸 주머니 속 라이터로 지지곤 했대요.
그렇게 살짝 고드름처럼 튀어나온 필름 끄트머리만 태우면,
순간 스파크가 튀는 데 그게 불꽃놀이라는 거죠.
아마 그때 아이들은 모두 한 번씩은 그 불꽃놀이를 해봤을 거예요.”
소리도 색도 없는 이미지들이 1초에 24 프레임씩 머릿속을 뱅뱅 도는 동안,
얼어붙은 시간이 서서히 녹아들어 현실과 꿈 사이를 오간다.
봉인된 시간 속으로,
우리는 모두 영혼이고,
공기는 속으로 녹아들며
눈에 보이는 바탕 없는 천 조각처럼
구름에 덮인 탑들
멋진 궁전들
엄숙한 사원들
위대한 세상 그 자체로
이 모든 게 이어지고
녹아 없어지며
사라지고 마는 공허한 야외극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마라
우리는
꿈을 꾸는 존재이고
우리의 삶은
잠에 둘러싸여 있으니…….
-셰익스피어, <템프스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