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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 ur mind Mar 16. 2021

빙글빙글 턴테이블과 영화음악에 대한 오래된 기억.

<LP, 또는 Vinyl> - 나의 이야기.

1949년에 만들어진 영화 <제3의 사나이>를 본 것은 스무 살이 넘어서였지만, 내가 그 영화를 알게 된 것은 열 살도 되기 전이었다. 우리 집에 있는 LP판 중에는 영화음악 OST 모음집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앨범에는 <제3의 사나이>, <남과 여>, <러브스토리> 등 유명한 영화들의 배경음악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앨범 재킷에 작게 인쇄되어 있던 영화 속 장면들과 제목들을 보며 막연하게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영화 속 내용들을 상상하곤 했다.


LP로 음악을 듣는다는 건, 참으로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무언가를 다루는 정서가 담긴 일이다. LP는 꺼낼 때도 조심스레 꺼내야 하고, 새까만 판 위에 한두 점 있을지도 모르는 먼지를 (역시나 조심하며) 살살 닦아내야 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 까만 플라스틱 위에, 세밀하게 패인 홈에, 딱 맞추어 바늘을 섬세하게 올려놓아야 하니....

아날로그 오브 더 아날로그 아닌가.


그렇게 아날로그하고 올드한 추억의 장면에는 언제나 햇살이 있다. 거실에 들어오던 햇살. 언제나 그렇지는 않았을 테지만 내 어린 시절 음악을 듣던 장면에는 노란색, 황금가루 같은 빛이 거실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언니나 오빠가 조심스레 바늘을 얹으면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 옆에서 작은 꼬마였던 나는 앨범 재킷에 인쇄된 작은 사진 한 장과 음악만으로 내가 보지 못한 저너머 세계의 이야기를 상상하곤 했다. 그렇게 '부드러움과 따뜻함'으로 기억이 고정된 유년시절의 한 장면에는 거실을 채우는 햇빛, 턴테이블, LP판, 그리고 영화음악이 있었다.


얼마 전 친구의 생일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OST 앨범을 LP로 구매해서 보내주었다. 가끔 턴테이블 위에 LP를 올려놓고 음악을 듣는 취미가 있는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선물로 LP를 사주고 싶었는데, 왠지 꼭 영화의 OST여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되어서겠지.


조심스레 바늘을 얹어놓고 LP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사운드가 재생이 되던 아날로그 감성이 그리운 날들이다. 내 삶에서 그렇게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다루고 정성을 기울이는 일들이 요즘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조심하게 살피며, 섬세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대하는 일. 그저 음악을 듣는 일 하나에도 절차가 있고, 소중하게 다루는 순서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 모든 일이 소중하게 기억되고 가치있는 일이 된다.

버튼 하나로, 손가락 터치 몇 번이면 모든 것을 쉽게 누릴 수 있는 요즘의 삶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 많기는 하지만, 그만큼 가볍게 터부시되고 잊혀지는 것도 너무 많다. 그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살짝 붙잡고 사는 나는, '옛날사람'인건가.


덧)

음악으로만, 앨범 재킷에  인쇄되어 있던 작은 사진 하나로만 알았다가 스무 살이 넘어 찾아보았던 1949년작 영화 <제3의 사나이>는 내가 아는, 가장 기억에 남는 엔딩씬을 가진 영화이다. 


영화 <제3의 사나이> 마지막 장면.


* 글: 나영/ 인스타그램 @etesian_wind

* 그림: 찰스/ 인스타그램 @slz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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