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중반, 매달 일정한 액수의 월급을 받는 일을 하면서부터 매주 화요일은 <씨네21>을 사는 날이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문화인(?)으로서 당연하고 타당한 소비라고 생각했고, 피곤한 귀갓길 버스 정류소의 가판대에서 갓 나온 <씨네21>을 사서 품에 안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읽곤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씨네21>은 늘 맨 뒷장부터 거꾸로 읽는 나만의 습관이 있었다. 보통 잡지의 마지막에 실린 칼럼을 먼저 읽는 게 좋았고, 표지를 장식한 배우들의 인터뷰는 천천히, 나중에 읽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영화나 영화감독, 갓 데뷔한 신인 배우들의 이야기들을 참 가깝고 친숙하게 느끼던 시절인 것 같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나와 상관없는 먼 세계와 나의 현실이 분리가 되고 점점 무신경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어릴 적,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밤 성우들이 더빙해 주는 주말의 명화나 명화극장으로 영화를 접한 옛날 사람이다. <ET>가 극장에서 본 첫 번째 영화였고, <백투 더퓨쳐 2> 개봉날 친구들과 대한극장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영화를 보러 간 시대를 살았다. 대학교 때는 시간이 남을 때마다 종로의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는 코스를 수백 번쯤 반복했고, 방학이 되면 언니와 집 앞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와 하루에 두세 개씩 영화를 보기도 했다. 홍콩영화가 주름잡던 시절을 살아서 왕가위 영화의 팬이었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누가 묻는다면 (분명히 그 후에 더 좋았던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마도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라고 답할 것 같다.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는 '황비홍'이어서 모든 시리즈를 다 봤는데, 나중에 내 이상형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하울'로 바뀌었다.
내 인생을 결정짓는 많은 '취향'은 대부분 왜 좋은지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별 이유 없이 그냥 나에게 좋은 것들이 대부분인데 왕가위의 영화도 그렇지만 홍상수의 영화도 그런 계열의 취향 중 하나여서, 이유는 잘 모르겠고 홍상수의 작품도 좋아한다. 우연히도 홍상수의 영화는 대부분 혼자 극장에 가서 본 게 많은데, 그분의 영화야말로 영화를 보고 나와 누군가와 느낌을 공유하기보다는 나 혼자 담아두는 쪽이 더 편하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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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베트남 호치민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2009년이었다. 호치민에서 살면서 내가 좋아하던 취미 생활을 누리는 것이 조금 곤란해졌는데.
1. 책 사는 것
2. 라디오 듣는 것
3. 영화를 보는 것
특히 위 세 가지가 그랬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내 나라에서 누리던 많은 것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나의 경우에는 사람들과 멀어지고 내 일과 멀어지는 것보다도 저런 문화생활에 대한 갈증과 아쉬움이 무엇보다도 커다랗게 느껴졌다.
호치민에도 CGV나 롯데시네마 같은 대형 극장들이 있고, 한국영화도 많이 수입이 된다. 한인교민이 많은 도시라서 그런지 간혹, 아주아주 유명한 외국 영화의 경우 한국어자막서비스를 지원해 주는 상영시간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십여 년 동안 내가 이곳에서 극장에 간 것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인 것 같다. 무언가 한국에서 느끼던 영화나 극장의 정서, 감성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도 예전만큼 영화산업이 잘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고, 스트리밍의 시대라 극장의 문화가 많이 달라졌다고 하니까 계속 한국에서 살았다고 해도 예전만큼 영화를 찾아서 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고 내 생활에 쫓기고, 현실적인 삶을 사느라 감성이 예전처럼 반응하지 않기도 하고...
이제는 아이패드나 노트북을 열어 보고 싶은 것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시대이지만, 가끔 영화를 한 편 볼까.. 생각을 하다가도 넷플릭스의 메뉴를 한참 뒤지다가 그만 포기해 버리는 일이 많다. 영화 한 편을 한자리에 앉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일이 언제부터인지 꽤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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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인가. 언니집에 갔다가 우연히, 아주 오랜만에 일본영화 <러브레터>를 다시 보게 되었다. 내용도 이미 다 알고 있고, 예전에 참 많이도 회자되었던 유명한 영화니까 별생각 없이 보다가, 예상외로 영화 속에 푹 빠져서 멍하니 보게 되었는데... 그만 눈물이 툭. 쏟아졌다. 그런데 그냥 영화 속 내용이 슬픈 것보다, 더 많이 마음이 흔들렸고, 더 많이 슬펐고, 주체가 되지 않을 만큼 눈물이 터져 나왔다. 눈물을 닦으며.. 아, 왜 이렇게 슬프지, 왜 이런 거지, 예전에도 이렇게 이 영화가 슬펐나...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90년대 그 영화를 보던 그 시절의 내가 내 안에서 툭. 튀어나왔다는 것을.
그때의 그 감성과 느낌을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내가 당황하고, 반갑고, 슬프고, 그립기도 한 그런 기분이라는 것을.
영화가 너무 좋아서 극장에 가서 찾아보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감독은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고 배우는 어떤 마음으로 영화 속에서 연기했는지 알고 싶어서 영화잡지를 찾아보고, 영화 포스터와 스틸사진 엽서들을 모으고, 영화를 본 뒤에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영화 이야기를 속닥이고 가슴 두근거려하던 그때의 나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 있구나... 를 깨달아버린 기분이었다. 그 느낌을 차지하는 대부분의 감정은 그리움이었고, 그 감정은 마음속에 구멍을 내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 슬픔이 생각보다 꽤 커다랗게 나를 관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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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한국에 갔을 때, 하루 동안 같은 극장에서 두 개의 영화를 연달아 혼자 보았다. 낮에 본 영화의 끝장면에 클로즈업되는 주인공의 얼굴에 나 혼자 아! 하며 가슴 두근거려하다가 극장 밖을 나와 저녁에 상영하는 영화 시간까지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 다시 같은 극장에 들어가 다른 영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또 그렇게 좋았다. 영화는 둘 다 별 다섯 개 정도까지는 아니고 별 세 개 반이나 네 개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그냥 그 시간이, 극장 속의 내가, 영화관 안의 분위기가 그저 좋았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바로 돌아가는 건 그날의 기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밤거리를 한참 걷다 들어갔다.
영화를 생각하다, 내 삶을 취향으로 채울 수 있는 순간의 소중함은 잊지 말고 살자고, 생각한다.
그림: 이소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