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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 ur mind Nov 15. 2024

파리에서 어른이 된다는 것.

너의 파리 - 이소현

나는 파리에서 성인이 되는 시간을 통과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근사하거나 색다른 경험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백 퍼센트 재미있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대학교 일 학년 때의 나를 다시 돌아보면 어떻게 이 세상에 뛰어든 건지 잘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아마도 내가 아니면 나를 지켜줄 사람이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하나씩 하나씩 산을 넘듯 해결해 나갔던 것 같다. 막연하게 혼자서 유학을 간다는 기대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은 일을 프랑스에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파리에 처음 와서 불어로 쓰인 건강보험과 주택지원 허가에 관한 서류들을  처음 읽었을 때의 혼란스러움을 기억한다. 보험 서류가 잘못되었다고 추가로 어떤 내용을 보내달라는 메일이 왔을 때, 도대체 무엇을 고치고 추가해야 하는지 너무나 막막하고 이해가 안 되어 눈물을 쏟기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스무 살이 되어야 성인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열여덟 살이 된 내가 모든 책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게 두려웠다. 법적으로는 어른이라고 하지만 내 마음은 아직 어린아이에 가까웠다. 여름방학이 되어 당장 다음 달 프랑스를 나가야 하는데 체류증은 없는 상황에서 문의를 하기 위해 시청에 전화 연결 하나를 위해 40분 넘게 기다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무너져 버리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점점 파리에서 사는 대학생의 삶을 체득하게 되었다. 내 이름이 적힌 은행계좌 신용카드를 받았던 날,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위해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던 날, 친구들과 지하철에서 보드카 몇 잔을 마시고 파리의 Le Duplex라는 곳에서 첫 클럽 경험을 왁자지껄하게 한 날... 그런 날들이 하나 둘 쌓이면서 나는 낯선 땅에서 아빠 엄마 없이 홀로 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난 늦은 저녁, 친구들과 맥주 한잔을 손에 들고 진상 손님에 대해서 푸념하는 짧은 순간이 주는 소소한 행복을 배우고,  식당에서 일하는 도중 손님이 두고 간 전화번호를 받은 날 ‘나 정도면 괜찮은가봐?’하는 자만도 슬쩍 느껴보었다. 처음으로 받은 2유로의 팁이 누군가에게는 하찮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기숙사에서 5KG 이상의 빨래  한 번을 돌릴 수 있는 감동의 금액이고, 아르바이트 월급을 처음 받은 날, 내 인생의 첫 월급이라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렇게 내 힘으로 수입을 얻는 자본주의의 맛이랄까, 그런 것들도 나는 파리에서 처음 배운 것이다. 


고등학생 때의 나는 때로는 불같고 정의가 넘치는 사람이었었는데, 부모님이 없는 낯선 땅에서 사는 나는 길에서 듣는 인종차별적인 말과 행동들을 무시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도 했다.(사실은 후폭풍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신념을 잃어버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한 발자국 더 성숙해지고 나를 스스로 보듬고 지켜줄 수 있는 현명한 어른의 태도를 배우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나는 파리에서 어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성장기가 유난하거나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주 주량은 잘 모르지만 와인 한 병 반이 내 주량이라는 것을 먼저 알게 되었고, 밥솥으로 맛있는 밥을 하는 법은 모르지만 오믈렛과 페스토 뇨끼를 더 잘 만드는 사람으로 살게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꼬들꼬들하게 지어진 새하얀 쌀밥에 오징어젓갈과 된장찌개를 먹는 것을 더 좋아하는 어른이다. 


그림: 이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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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행정 처리는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시스템으로 따지면 내가 살고 있는 베트남도 답답하고, 체계적이지 않고, 약속 안 지키기로 유명해서 웬만한 일에는 그러려니 할 만큼의 경험치가 있는 사람인데 파리는 베트남의 무신경과 게으름 말고도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거만함' 혹은 '불친절함'이 한 스푼 추가된 상태였다. 무언가를 물어볼 곳도 없거니와, 찾아가서 물어보고 안내를 받고 싶어도 퉁명스러운 곳이 많기도 했다. 내가 아이를 혼자 두고 다시 돌아와야 하던 날, 열여섯 시간 비행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래도 아이는 그곳에서의 삶을 잘 버텼다. 아니, 잘 버텨내 준 것처럼 보여주었다. 열두 살 때부터 다닌 프랑스학교에서의 경험으로 언어적인 어려움은 없었으니까, 그 덕을 많이 보았겠지...라고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과연 언어적 소통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했을까? 나라면 소현이만큼 잘 해낼 수 있었을까?


사실 사람을 힘들고 막막하게 하는 일들의 대부분은 커다란 일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고, 부모가 챙겨주는 밥을 먹고살던 소녀가 어느 날 커다란 도시에 뚝 떨어져 혼자 해결해야 하는 모든 일들의 가짓수는 얼마나 많았을까. 아이는 그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하거나, 투정 부리지 않았다. 잘 지낸다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경험을 하며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것은 아마도 혼자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그 도시에서의 삶에 적응을 한 경험도 있겠지만 작고 소소한 일들의 어려움보다는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들을 찾아 자신의 삶이 반짝인다고 믿고, 미래의 더 나은 자신을 위해 애쓰는 과정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소녀가, 아름다운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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