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 청춘이 어린 보랏빛 꼬리구름

by 다이안 Dyan

맨투맨 하나 입고 돌아다니기 딱 좋은 바람이 부는 선선한 날이다. 소매 안으로 손을 말아 넣고선 소매 끝을 팔랑팔랑 휘두르며 쾌청한 날씨를 따라 걷는다. 그러던 중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날아온 진한 꽃향기가 코를 간지럽힌다. 팔랑거리던 손짓도, 조금은 들떴던 걸음도 멈추고선 향의 시작점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킁킁. 그래, 라일락 바로 너였지. 보랏빛의 자그마한 꽃이 5월을 알리는 싱그러우면서, 달짝지근한 향기. 그렇게 너의 향이 내 코끝을 맴돌면, 나의 입꼬리는 자연스럽게 하늘을 향한다. 이 계절에 만나는 너의 향은 코끝을 맴도는 보랏빛 꼬리구름이 되어 괴로운 시간을 잠시나마 잊고 날씨에 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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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향기를 담아내고자 애쓰는 향수들은 너의 하트모양 초록 잎을 연상시키는 허브 향으로 시작하곤 한다. 그렇게 초록의 싱그러움과 함께 진한 보랏빛 향을 즐기다 보면, 막 세탁기에서 나온 듯한 뽀송한 비누 향의 머스크가 너의 보랏빛 향을 마무리한다. 5월의 선선한 바람과 살가운 햇살이 잘 말려 놓은 빨래처럼 적당히 뽀송하고 싱그러운 너의 향기. 아직 너를 완벽하게 재현한 향수를 찾지 못해, 이맘때 나의 코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너의 꽃이 지기 전, 나만의 환각제를 잔뜩 즐기려면 말이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한 편의 청춘 드라마를 떠올리게 하는 노랫말처럼, 너의 포도송이 같은 보라색의 꽃은 싱그러운 청춘을 떠올리게 하나 보다. 너의 보랏빛 꽃말이 “젊은 날의 추억”, “첫사랑”인걸 보면. 청춘을 그리워하기에도, 주장하기에도 애매모호한 30대에 청춘을 이야기하자면, 자연스럽게 조금 더 풋풋했던 20대를 떠올린다.


숲을 사랑하는 조직에서 인턴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식물을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원봉사자들보다 식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워 식물원에서의 일 년을 택했다. 직원이 아닌 교육생이라는 신분이 주어졌고, 내가 제공한 노동은 실습으로 둔갑하여 월급이 아닌 40만 원의 지원비로 돌아왔다. 정원사에게 하얀 얼굴은 사치이지만, 그 사치를 지키고자 꽃무늬 가림천이 달린 모자를 함께 맞췄다. 정원사를 꿈꾸던 청춘들은 관절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기계처럼 분갈이하던 손목도, 하루 종일 쪼그려 앉던 무릎도, 비료 포대를 들어 올리던 허리도. 그렇게 청춘들은 하루하루 밭일하는 노인에 가까워졌다. 청춘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은 일을 더 했고, 편의는 금했다. 작은 사치를 위한 우리의 작업 모자도, 쪼그려 앉다 지친 무릎을 달래려 철퍼덕 앉은 우리의 자세도. 그들은 보기 안 좋으니 하지 말라 금하기 바빴다. 고된 몸과 불합리한 처우 속에서 잔뜩 예민해진 나는 그렇게 다시 사춘기를 맞이했다.


사나운 태풍에도 고요를 이루는 태풍의 눈이 있듯이, 질풍노도의 시기와 환경 속에서도 평화는 있었다. 새로운 식물과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직접 느낄 수 있던 시간이 즐거웠다. 학교 안에서는 전공이 같아도 식물을 주제로 이야기 나눈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식물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공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오늘은 어떤 나무가 새잎을 냈는지. 어디에 새로운 꽃이 새초롬히 얼굴을 내밀었는지. 어느 꽃과 잎이 어떻게 매력적인지. 그렇게 바깥에서는 누릴 수 없는 대화를 나눴고, 자연의 사계절을 함께 호흡하며 즐거움을 쌓았다.


십 대의 사춘기에서 우정이 버팀목이 되듯, 두 번째 사춘기도 그랬다. 함께하는 벗, 동기들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고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저녁이면 기숙사 식탁에 모여 앉아 주전부리와 어른을 씹어먹었다. 함께 식재료를 지지고 볶고, 빨래를 널며 매일을 같이 살았다. 누군가 새로 심을 씨앗이나 뿌리를 내릴 가지를 주워 오면 베란다에 둘러앉아 흙장난을 했다. 한 사람이 지쳐 보이면 조용히 맥주를 가지고 나왔고, 그것도 부족할 때면 다 같이 교통카드를 쥐고 외식을 떠났다. 자매가 있길 소망했던 나에게 그렇게 세 명의 자매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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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너의 작은 꽃이 옹기종기 모여 피듯이 우리의 청춘도 그렇게 함께 모여 피어났다. 떠날 때는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을 시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꽃송이들은 시간이 지나 다시 모여도 여전히 그때의 향기를 그리워한다. 너의 보랏빛 향기는 몸이 부서져도 식물이 좋았던 우리네의 청춘을 그리게 한다. 내 청춘의 향기에는 촉촉한 흙냄새, 이슬에 젖은 초록 잎 내음이 있다. 비가 오기 전후의 습한 공기가 너의 향을 한층 짙게 만들 때면, 나의 무릎과 발목의 통증도 한층 더 짙어지곤 한다. 짙어진 통증을 멀리하듯, 지금은 식물을 뒤로한 채 새로운 길을 걷게 됐다. 아니, 사실 뒤로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마음속에는 애정이 남아 나의 길가에 너를 심었다. 잊지 못할 첫사랑 같은 나의 젊은 날의 추억을 담아 글을 쓰고 사진을 담는다. ‘삶, 생명은 늘 푸르다. (Vita sempervirens)’는 말처럼, 늘 푸르게 나의 곁을 맴도는 너의 보랏빛 꼬리구름은 오늘도 싱그럽고 향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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