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나무 : 안녕, 어린왕자

by 다이안 Dyan

‘카톡!’

[사진]

[S: 네이버가 10년 전 우리 모습 알림해줌ㅋㅋㅋㅋㅋ]

점심 먹고 한껏 나른해져 일하기를 거부하는 눈꺼풀과 사투를 벌이던 그때, 잠을 깨우는 메시지 하나. 어디선가 한껏 단풍놀이를 즐기던 우리 4인방의 앳된 모습이 들어있다. 주변의 노랗고 빨갛게 물이 든 단풍 배경과 함께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M: 저게 언제 적이야! Soil 머리봐ㅋㅋㅋㅋ아니 옆에는 설마 김오빠야? 언제 같이 찍혔대ㅋㅋㅋ]

아하, 알겠다. 녹화식물학 수업에서 실습의 하나로 갔던 어느 수목원이었던 거 같다.

[Dyan: 저거 3학년때 녹화식물학? 그거 견학 갔을 때 아냐?ㅋㅋ우리 완전 애기들이네]

[S: 오! 맞는듯?ㅋㅋ 기억력도 좋아]

[G: 그러게 ㅋㅋ과목명까지 기억하다니! 저때 엄청 추워서 학교 오자마자 국물 찾았던 날 아닌가? 사진은 또 안 추워보이네]

맞아. 아마 늦가을을 향해 무르익어 가는 계절감과 함께 기온은 훅훅 떨어지던 시기였을 거다. 날은 추운데 멀리까지 견학 가기가 싫어서 투덜거리며 버스에 탔다. 갔다가 또 저녁 강의 들으러 언제 오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함께하면 뭐든 즐거운 시기였고, 코에 바람이 들자, 가슴 속 어딘가에서 흥이 끓어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앞에서 설명하는 강사님과 수목원 직원의 시선을 피해 숨었다. 무리와 살짝 뒤처져 걸으며 수다 삼매경에 낄낄거리고, 바닥에서 발견한 예쁘거나 특이한 단풍잎을 집어 들고선 팔랑거렸다. 수목원에 온 목적은 가볍게 잊은 채 우리만의 단풍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과제도, 시험도 모두 기억에서 날려버린 채 말이다.


단체채팅방의 메시지를 보다가 잠도 깰 겸, 추억여행이나 마저 해볼까 싶었다. 그래서 나의 드라이브에 들어가 알림 메시지를 눌러 사진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진 중 샛노란 큰 잎 하나로 입을 가린 채, 큰 나뭇잎으로 내 얼굴을 대신하며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핸드폰 액정화면에 비추는 지금의 내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와, 나 되게 해맑았네?


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조차 재밌던 22살의 내가 들고 있는 커다랗고 노란 잎은 튤립나무잎이었다. ‘백합나무’라는 정명보다 튤립나무로 불리는 그 이름이 특이해서 견학 중 유일하게 외운 나무 이름이었다. 꽃 이름으로 만들어진 나무 이름이라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호기심을 자아냈다. 생김새가 닮았나 싶어 고개를 올려 보니 곧게 쭉 뻗은 수간과 함께 높은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백합도 꽃집에서 팔 때 보면, 줄기가 곧긴 하다. 하지만 이름까지 붙일 공통점 같지는 않다. 다시 고개를 한없이 뒤로 젖혀 보지만, 내 목만 저릿할 뿐이었다. 그래서 바닥에 떨어진 잎으로 눈을 돌려 백합나무의 잎을 집어 들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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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과 떨어진 산이라서 더 큰 건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잎. 알맞게 구워낸 쿠키 같은 예쁜 노란색. 어린아이가 과자를 모서리마다 한 입씩 베어 물어낸 모양. 거기다 잎자루도 길어서 손에 들기도 딱 좋은 크기였다. 딴짓이 고팠던 몸만 큰 스물두 살에겐 이만한 장난감이 없었다. 그래서 일곱 살이라도 된 양 잎자루를 잡고선 큰 잎을 빙글빙글 흔들었더랬다. 하지만 이 노란 장난감도 녀석의 이름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그렇게 “왜 튤립나무야?”라는 미운 네 살 같은 질문은 팔랑팔랑 흔들던 노란 튤립나무잎과 함께 그곳에 두고 왔다.



천진난만한 질문은 잊은 채 서른이 넘어버린 어른이는 6월의 어느 날, 마트를 가는 길에 튤립나무를 다시 만났다. 여전히 곧게 뻗은 매끈한 모습이지만 지난번보다는 앙증맞았다. 단풍이든 노란 잎 대신 초록 잎으로 파란 하늘을 마주하고 있다. 싱그러운 초록의 머리칼을 살짝 젖히니 연노랑 왕관이 보인다. 이 예쁜 왕관을 잎 사이에 숨겨두다니, 넌 수줍음이 많구나. 곧게만 보이던 모습에 지난번보다는 작아진 키가 더해지니 어딘지 쭈뼛대는 것 같기도 해. 어린 왕자처럼 말이야.


잠깐, 어린왕자야. 너의 그 왕관을 다시 봐야겠어. 잎이 덜 무성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카메라 화면을 쭈욱 당겨본다. 너의 왕관은 피어난 튤립의 모습을 닮았네. 꽃잎에는 주황색 커다란 보석을 박고 있네. 어린 왕자야, 나 지금 옛날에 내 어린아이 같던 질문에 답을 찾은 것 같아. 가을에 미처 보지 못한 너의 왕관이 활짝 핀 튤립을 닮아 너의 이름이 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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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는 사막에서도 끊임없이 질문했지. “무슨 뜻인가요? 그게 전부예요?” 어른이 된 나는 ‘그런가 보다.’하고 시간에 묻고 가는 질문이 많아졌지. 어린왕자는 불평도 했어. “어른들은 정말로 이상해.” 어른이 된 나는 ‘어른들은 다 그래.’라며 젖어 들 평범함을 찾아 헤매지. 그러던 6월의 어느 날, 어린왕자 너는 내게 질문 대신 답을 건네왔다. “잊지 말아요, 당신의 동심을.” 그날과 같은 천진난만함의 존재를 잊지 않고 지켜낸다면, 그때는 나의 해맑은 웃음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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