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뒤렌마트
젊은이는 어느 일요일 오후 여느 때처럼 17시 50분에 출발해서 19시 27분에 취리히에 도착하는 늘 타던 기차를 탔다. 기차는 20분쯤 지나 조그마한 터널 속으로 들어간다. 터널은 그리 길지 않다. 평소 터널 속으로 들어갔을 때, 터널에 대해 생각할라치면 터널 밖으로 빠져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터널은 짧았다.
그런데 그 날은 평소와는 달랐다. 터널로 들어간지 5분이 지났는데도 기차는 여전히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자신이 기차를 잘못 탔다고 생각했다. 차장을 붙잡고 물어보았으나 19시 27분에 취리히에 도착하는 기차가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차는 20분이 넘게 터널 속을 달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기차가 잘못된 곳으로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승객들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장기를 두고, 책을 읽고,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기차가 갑자기 엄청난 굉음을 내며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을 굴러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젊은이는 기차의 운행을 책임지는 여객전무를 찾아 기차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다. 기차는 한 칸에서 다른 칸으로 이동이 어려울 정도로 폭주하고 있었다. 젊은이와 여객 전무는 통로를 따라 기다시피 해서 간신히 기관실로 옮겨갔다.
기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관사는 이미 기차를 버리고 내렸던 것이다. 기차의 속도는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빨라져 있었다. 여객전무는 비상브레이크를 잡아 당겼으나, 브레이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기차는 "점점 기울어지면서 그 무시무시한 추락 끝에 만물의 귀착점인 땅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이제는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이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기차, 기관사 없는 기차, 끝도 없이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 추락하는 기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습으로 읽힌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인류는 진보해 왔고, 이성적 사유로 발전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대책없는 낙관이다. 별 일 없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기대를 가지고, 매일 변화없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는 저 폭주하는 기차 속의 승객들과 다르지 않다. 소설 속 젊은이의 말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낙관할 수는 없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인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졌는가(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계몽의 변증법>)"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는 것만이 저 폭주하는 기차를 멈춰 세우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