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쌀쌀한 늦가을이었다. 한 달 넘게 야근과 식사를 걸러 가며 기획한 프로젝트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평소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잔소리가 심했던 팀장은 그날도 어김없이 나를 호출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가 심각하다. 하지만 심각한 일이 아님을 십 년의 직장 생활로 인해 알고 있다.
“잠깐 차 한 잔 하지?”
차는 구실이고 본론은 따로 있었다. 그저 권위의 위엄을 보여 줄 상대가 필요한 것이었다. 회의실에 마주보고 앉은 우리 둘은 어제 행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니,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들었다.
내용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어서 빨리 자리로 돌아가 어제 행사에 대한 증빙자료를 챙기고 결과 보고를 작성하고 싶었다. 이것이 늦어지면 또 다시 한 마디 들어야한다. 끝나지 않는 이 굴레 같은 생활에 점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행사 이야기로 뚫린 그의 입은 어느 덧 개인사까지 넘나들고 있다. 과한 관심에 감사를 해야 할지, 한마디 쏘아붙여야할지 고민하다가 묵묵히 듣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대꾸 없이 듣는 모습을 보아서 그런지 그는 더욱 열변을 토하며 ‘그렇게 하면 안 돼.’신공을 펼친다. 내가 묵묵히 듣는 이유는 그나마 이것이 가장 빨리 끝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30분...1시간...’
테이블 위에 올려둔 핸드폰 액정에 비친 시계를 보니 오후 3시를 향하고 있었다. 이 좁은 회의실에 점심 먹고 1시 쯤 들어왔으니 2시간 쯤 됐다. 듣는 것쯤이야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들을 수 있지만 이 이야기를 ‘왜’들어야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오래 전부터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했던 한마디를 꺼냈다.
“퇴사하겠습니다.”
“그래서 내말은...”하며 말을 이어가려다 내 말을 들을 그의 눈이 솔방울만해진다. 생각으론 이미 천 번도 넘게 말했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ㅌ’발음이 주는 차가움과 건조함은 생각보다 명쾌하고 차가웠다. 아주 오래 전.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그것은 아마 태곳적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부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이미 입사와 함께 퇴사의 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날 그의 눈빛을 기억한다.
‘네가 나가는 것은 상관없는데 왜 그게 하필 지금이야?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딱, 이정도의 눈 말이었다.
언젠가 결심했다. 내 입에서 회사를 떠나겠다는 말이 나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10년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 했다. 다시는 회사원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