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힘, 친절함에 관하여

by 라이팅게일

하루가 다르게 녹음이 짙어져가던 지난해 7월의 어느 날, 나는 토론토의 한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한국 마트를 포함 아시아 마트에는 일반적인 카트와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높이의 유모차 밀듯 밀 수 있는 플라스틱 카트가 있다. 도시의 마트가 그러하듯 그곳도 작은 공간에 여러 물건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어 작은 카트를 끌고 좁디좁은 골목길을 운전할 때처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히 다녀야 했다. 처음 가보는 곳이다 보니 섹션 별로 비효율적인 동선으로 둘러보는데 아까부터 쌓인 물건 틈 사이로 땅이 꺼질듯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한국에서라면 전역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법한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쓴 동그란 얼굴의 청년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마트 로고가 박힌 파란색 조끼를 입고 좁은 통로를 오가며 박스를 옮기는 그를 보니 이곳에서 일하는 청년인가 보다. 그날따라 어떤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짜증 섞인 한숨을 몰아쉬기에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도록 살금 살금 걸어 다녔다.



신선 코너에 가서 오이를 담으려고 했는데 그 청년도 어느새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에게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내 카트를 그가 정리하고 있는 블루 베리 박스를 가득 실은 화물용 카트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주차해두고 치아처럼 가지런히 놓인 작은 랩에 쌓인 오이를 집어 드는데 별안간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그가 정리하고 있던 내 키보다 더 큰 블루 베리 박스들이 일제히 쏟아졌고(피사의 사탑처럼 아슬아슬했던) 박스가 떨어지면서 내 카트 바구니도 뒤집혀 있었다.

나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내 카트를 다시 세우고 정리한 다음 맨손으로 여기저기 유리알처럼 굴러 들어간 새파랗고 귀여운 블루베리들을 그와 함께 줍기 시작했다.



블루 베리가 쏟아지고 난 후에는 그의 짜증 섞인 한숨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원래 너무너무 화가 나면 한숨조차 나오지 않는 법이다). 내 도움의 손길에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는지 괜찮다는 그의 말에 나는 아니라고, 둘이 하면 빨리 끝날 거라고 간결한 위로를 건넸다.



블루베리의 달콤함과 색에 찐득하게 물든 내 손을 보고 그 청년은 내게 고맙다며 건물 지하에 손을 씻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멋쩍은 듯 말했다.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짜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허탈함의 미소가 번져 있었다.



캐나다에는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들이 많다. 몸에 배어 있달까. 나도 그 친절에 어느새 함께 물들어 예전보다 누군가를 돕는 상황에 용기 낼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도 친절함의 한 일부가 된 느낌.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친절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캐나다에 살고 있으니까.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눈이 한창 내리던 지난 1월 15일, 당시에 특정 팀홀튼 지점이 마음에 들어 자주 갔는데 내가 좋아하는 Steeped tea 한 잔을 홀짝거리며 글을 쓰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지난 직후의 아침 시간이라 그런지 비교적 한산했고 다만 나처럼 노트북을 들고 미팅을 하거나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 붐비진 않았지만 몇 개 없는 테이블에 한 사람이 넓은 테이블 하나씩 차지하고 있으니 이내 작은 테이블만 남아 있었다.



나도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창가 앞 테이블에서 쌓인 눈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샌가 세 명의 나이 지긋하신 숙녀분들께서 들어왔다. 2인용의 테이블에 세 명이 옹기종기 모여 앉더니 주문을 하기 전 집에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쿠키랑 간식을 테이블 가득 세팅해두신다. 떡이나 약과 같은 것을 가져와 함께 나눠먹는 한국의 아주머니들의 모습이 떠올라 어쩐지 정겨웠다.



거리에 가지런히 쌓여있는 눈처럼 어느새 그녀들의 머리에 내려앉은 눈처럼 세월과 함께 쌓인 곱게 빗겨진 눈 색을 닮은 단발머리의 그녀들에게 말했다.


"세 명이 앉기엔 테이블이 작아 보이는데 저랑 바꾸실래요? 보다시피 제 테이블은 저 혼자 앉기엔 너무 넓어서요."



하이톤의 한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친절에 고맙다고 괜찮다고 편히 있으라고 했다. 머리가 하얀 나이 드신 숙녀분들의 따숩함은 어쩌면 만국 공통인듯하다.



내가 건넨 한 마디에 그녀들 뒤에 앉아 있던 한 아저씨도 거든다. 자기도 자리를 바꿔주겠다고. 행복해하는 그녀들의 웃음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노트북으로 돌렸다.



30분쯤 지났을까 가느다란 흰 손이 내 화면을 가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트리오 중 한 숙녀분이 수줍게 파란 초콜릿을 건넨다. 파란 초콜릿에는 파란 클립이 달려 있었는데 지난 성탄절 트리에 오너먼트로 달았던 것이란다. 나의 따뜻한 친절이 자신의 하루를 만들었던 것처럼, 귀여운 오너먼트가 오늘 하루의 즐거움이 되길 바란다며 그녀들은 이내 자리를 떠났다.



내가 친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서였다. 11년 전 이혼 소송 중 괴롭디 괴로운 마음에 찾아 읽은 책의 저자를 만나기 위해 호주의 한 명상 센터로 무작정 떠났다. 그때부터 나의 명상 구루가 된 아잔 브람은 'Mindfulness'에 친절함을 더해 'Kindfulness'를 강조하며 자애명상(Loving kindness meditation)을 실천하시는 분이다. 그가 말하는 친절은 단순한 명상 기법을 넘어 그 자체로 태도이자 존재 방식이다. 그의 가르침대로 호주의 한 국립공원 속 캥거루가 뛰어다니는 야생 속에 위치한 명상센터와 수도원은 친절함으로 흘러넘친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하다. 그저 나 자신과 다른 모든 존재들에게 친절하라고.



타인을 향한 작은 친절의 작은 순간들은 그들에게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친절로 인해 내가 받는 치유와 행복이 더 크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슈퍼파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친절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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