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강한 눈보라가 다녀갔다. 세찬 바람소리와 함께 눈이 창문을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거실 창밖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투명한 하늘색의 맑은 하늘과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정도였다. 우리 집 뒷마당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나무의 앙상한 가지마다 하얀 눈이 솜털처럼 내려앉았고 그곳에 햇빛이 비추어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거실의 테이블 한가운데에는 어제 사다 놓은 보라색 후리지아를 꽂아 놓은 작은 꽃병이 놓여 있다. 하나만 피어 있고 나머지는 아직 안 핀 봉우리로 샀는데 아침이 되니 꽃이 제법 많이 피어 있다. 물도 반으로 줄어 있고.
어제는 강한 눈보라가 온다는 일기 예보에 주말 내 움직이기 어려울 가능성을 대비해 오후 늦게 장을 보았다. 보통은 식구들과 함께 장을 보는데 곧 닥칠 눈보라로 우리 집에서 가장 여유로운 사람인 내가 급히 길을 나섰다. 나온 김에 몇 군데 더 들려서 완벽하게 장을 볼까도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오늘은 한 군데만 다녀와야지. 요즘 나는 나의 쓸데없는 완벽주의 성향을 내려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한국 마트에서 장을 본 후 집에 빵이 떨어졌음을 깨닫고(우리 집의 주식은 대체로 빵이고 보통 빵은 한국마트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슈퍼마켓에 들렀다. 지하 주차장에 가는 길 목에 꽃 파는 섹션이 있는데 그날따라 꽃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는 거다. 본 김에 꽃구경이나 할 겸 서성이고 있는데 한 바구니에 후리지아가 가득 꽂혀 있는 걸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봄을 알리는 후리지아. 한국에 있을 때는 지하철 가판대에서 후리지아를 팔기 시작하면 봄이 온 것을 실감하고 했다. 아 그래 한국은 이제 새 학기 시작하겠구나. 3월이니까. 한국의 3월은 늘 새로운 느낌이 있으니까. 분명 2월은 졸업식이다 뭐다 마무리이자 끝의 분위기인데 삼일절이 끝나고 나면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리셋된 느낌, 새로운 시작의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해마다 3월이면 어쨌거나 저쨌거나 늘 설레는 마음이 있었다. 후리지아를 보니 그때의 설렘과 새 학기의 풍경이 생각이 났다. 다수의 노란색 후리지아와 간간히 있는 하얀색 후리지아 옆에 끼여 있는 보랏빛깔의 후리지아를 발견했다. 보라색 후리지아라니! 난 왜 여태 몰랐지?
두런두런 생각에 잠겨 꽃을 꽂았다 내려놨다 하고 있으니 어느새 옆에서 꽃을 고르러 온 한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다.
“Too many choices, huh?”
"Exactly!" 하며 나도 맞장구를 쳤다. 실제로 거기엔 파란색 수국, 하얀색 수국, 핑크색 자주색 빨간색 등의 장미, 후리지아, 안개꽃 등 다채로운 꽃들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었으니까. 진열대 한가운데에는 한 단만 사면 11.99불, 세 단 사면 30불이라고 할인 프로모션이 떡하니 붙어 있었다. 아저씨와 저거 장삿속이라며 결국 2불씩밖에 세일 안 해주는 거네~ 나는 세 단은 너무 많아 이러면서 잡담을 하고 있는데 이 아저씨, 수염은 덥수룩하고 검은색 파카 후드를 뒤집어쓰고 스노 팬츠에 작업 신발을 신으신 것을 보니 슈퍼마켓 옆 공사장에서 일하다 퇴근하시나 보다. 장미꽃이 한 다발에 12불이면 나쁘지 않겠지라고 말하며 고심 끝에 고른 아저씨의 선택은 쨍한 핑크빛이 나는 장미꽃 한 다발. 꽃은 누구를 위한 거냐 물으니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거란다. 강한 눈보라가 예고된 금요일 퇴근길에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핑크빛 장미 한아름이라니.
이런 스윗한 캐네디언 아재 같으니.
캐나다에서는 비교적 꽃을 사기 쉽다. 슈퍼마켓 어디에든 마치 빵 진열대나 맥주 진열대처럼 꽃 섹션이 있다. 아무래도 꽃집에서 꽃을 사려면 꽃집을 검색해서 가야 하고 가더라도 보통은 꽃집 규모가 작은 공간이다 보니 꽃이나 화분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서 구경해야 하는 불편함에 비해 여러 종류의 꽃이 다발로 포장되어 플라스틱 양동이에 꽂힌 것을 카트를 밀다가 그냥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한 다발 집으면 되니 꽃집에서 사는 것에 비해 편리하고 자유롭다. 다만 포장이 예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투명색 비닐로(어쩐지 내 눈에는 새 학기 교과서를 싸던 투명 비닐처럼 생겼다) 무심하게 포장되어 있는데 나쁘지 않다. 꽃을 싼 투명 비닐에는 바코드도 붙어 있어서 셀프 계산대에서 계산도 가능하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나도 한국에서보다 꽃을 자주 사게 됐다. 장을 보다 우유 사듯이 살 수 있는 편리함 덕분이기도 하고 꽃이 한국보다 저렴한 편이기도 해서.
지난 발렌타인데이 저녁, 딸아이와 함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다 즐거운 광경을 보게 되었는데, 온 동네 퇴근하는 남자들이 전부 그곳에 모였는지 꽃을 사려고 줄을 짓고 있었다. 발렌타인데이에 맞게 쇼핑하기 쉽도록 슈퍼마켓도 평소보다 많을 수요에 대비해 입구에 크게 꽃 섹션을 별도로 꾸며 놓았고 바로 옆에 있는 계산대는 꽃 계산 전용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그날은 특별히 계산대에 부탁하면 포장도 해주는 것 같았다. 젊은 이고 아저씨고 할아버지고 퇴근길에 가볍게 들러 장미 한 아름씩 사가는 풍경. 무엇보다 우리 동네에 이렇게 스윗한 아저씨들이 많다니 흐뭇했다. 이렇게 스윗한 아저씨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대체적으로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 많다는 의미일 테니까. 동네를 평가할 때 역세권이나 숲세권처럼 스윗한 가정권이라는 기준이 있다면 우리 동네는 꽤나 높은 점수를 받을 것 같다!
"Have a good evening!"
다정한 손인사와 함께 그는 나보다 먼저 계산대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그 자리에 남아 흰색으로 살까 보라색으로 살까, 아님 두 개를 다 살까? 고민하다가 보라색 프리지어 한 단을 집었다. 슈퍼마켓에 나오니 어느새 날은 더 흐려지고 어둑어둑 해졌다. 눈보라가 시작될락 말락 세찬 바람이 부는 황량한 날씨지만 어쩐지 우리 동네가 더욱 스윗하게 느껴졌다. 밝은 얼굴로 진한 핑크 장미꽃을 건네줄 아저씨의 설레는 미소가 눈에 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