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루 더 살아보기로 했다] 퍼핀
죽는 순간을 생각하면 거실 천장이 보인다. 죽을 뻔한 순간은 수없이 많았지만 정말로 죽는 순간을 떠올려 본다면 역시 사각형 전등이 네 개 달린 그 천장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날의 나는 여느 때처럼 혼자 남은 집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있었고, 잠을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한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어지러움이 몰려오지만 반복해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조금 더 서두른다. 바닥에 발을 딛는다. 한 발, 한발……. 세 번째 발걸음에서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거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다. 머리가 빙빙 돈다. 서둘러 퇴장하는 사람들의 그림자에 자주 가려지는 영화관 엔딩 크레딧 화면처럼 앞이 미세하게 보였다가 흐려진다. 끝인가? 아무래도 끝이겠지. 눈이 자꾸만 감긴다. 졸리다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잠에 들었던 것이 꽤 오래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이대로……. 거실 천장이 보인다. 사각형 전등이 네 개다. 죽는구나. 드디어 드디어 죽는구나, 생각한다.
5개월이 안 되는 기간 동안 20키로가 빠졌다. 정상 체중의 범위에서 엇나간 것은 이미 오래였고, 맞는 옷이 없어 초등학교 시절에 입던 바지의 허리를 조여서 겨우 입었다. 걷는 것에 이렇게 많은 뼈의 부딪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뼈와 의자의 딱딱한 부분이 바로 닿는 듯한 느낌에 오래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을 거실 소파에 누워서 보냈다. 사흘 넘게 아무것도 먹지 않는 것이 익숙했고, 무언가 먹게 되더라도 소화를 할 수 있는 두유 한 팩과 삶은 양배추 조각 몇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먹고 나면 배가 불러 두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명백한 거식이었지만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나를 구성하는 다른 정신 질환들처럼 지나가는 질병일 것이라고 믿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여성청소년에게 거식이 그렇게 흔치 않은 질환도 아니었기에.
다른 질병들이 으레 그러하듯 먹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복합적인 이유로 우울했고, 그 우울함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와중에도 다시 배가 고파지는 것이 구역질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주제에 살아보겠다고 음식을 씹는 것이 역겹게 느껴졌을 뿐.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만 찬 기운이 있는 물을 마시면 여름의 날씨에도 몸을 으슬으슬 떨게 되는 오한이 죽음의 감각이라고 믿었고, 흐릿하게 보이는 그 거실 천장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명백하게 ‘죽는 순간’이었지만 아쉽게도 그날 나는 죽지 않았다. 몇 번을 더 깜빡거리니 점차 거실 천장의 사각 전등이 뚜렷해졌고, 눈이 아플 때까지 멍하니 그 전등의 빛을 바라보다가 다시 일어섰다. 현관에 나가니 택배 기사가 두고 간 택배 박스가 있었다. 차마 들어 옮기지는 못해서 칼로 박스의 입구를 잘라서 열었다. 사과가 가득 들어있다.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사과 하나를 집어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부엌에서 그 사과를 씻고 작게 조각내어 입에 넣었다. 아삭하고 단맛. 조금 섞인 새콤한 맛. 나는 그 맛을 꼼꼼하게 씹어냈다. 그날 이후로 사과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어떤 것의 회복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말해보려고 한다. ‘죽는’날 내가 사과를 먹었던 이유에 가장 근접하게 맞닿아 있는 것은 분명 어떤 명랑함일 것이다. 그 시기의 나는 거실 천장 밑에 하루 종일 누워 일본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를 봤다. 주로 사람이 죽는 작품들을 봤는데 단순히 죽는 것은 아니고 사람이 안 죽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나오는 사람이 죽는 작품들을 봤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죽어 가는데 그 속에서 그들의 죽는 이유를 죽을 만큼의 힘을 들여 찾아내고, 또다시 죽을 것 같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 같은 건 알 바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이유에는 논리적인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명랑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말처럼 내가 죽은 것도, 또 죽지 않은 것도 이유가 없다는 것이라면 역설적이게도 그 모든 것이 이유가 있는 것이 되니까.
일본 작품들의 클리셰를 엮어 그것들의 작품성을 폄하하는 유머글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다. 아무리 늦어도 입에 식빵은 물고 등교해야 하는 학생, 어떤 크기의 좌절이더라도 좋아하는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 간바떼(頑張って,힘내)-! 외칠 수 있는 친구들, 결전의 순간이면 추억이 가득 담긴 소울 푸드를 경건한 마음으로 입에 넣고 강해지는 주인공……. 그들은 그 작품들이 도저히 현실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티 없이 맑은 인물들이 단순하고 정형화된 형태로 재생산한다며 재치 있게 지적했는데, ‘죽는’ 사과의 맛을 기억하는 나는 그 재치의 동의할 수 없다. 그 씩씩하고 명랑한 인물들의 마음은 애초에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이기에.
비관은 어느 정도 쉽다. 그 탓에 우리는 자신을, 타인을, 상황을 너무 쉽게 미워하고 싫어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시간과 마음을 들여야 하고 가끔은 스스로를 바꿔가며 타협까지 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충분히 미워하고 좌절할 상황에도 씩씩하고 명랑한 인물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힘을 낸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분명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복잡하고 끔찍한 세상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중인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명랑함이 너무 단순하고 익숙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사과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주는 용기가 되었으니까.
시간이 지나 이제는 체중도 정상의 범주에 들어왔고. 먹고 싶은 것도 자주 생기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가끔 공복이 길어질 때면 여전히 자주 쓰러지고 그렇지만. 조금만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자꾸 구역질이 나지만. 좌절이 생길 때는 다시 아무것도 먹고 싶어지지 않지만. 그럴 때마다 그 수수하고 익숙한 명랑함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그것들의 명랑함을 응원한다. 그 명랑함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그들이 기꺼이 하루를 더 살아가게 만들 수 있기를.
* <명탐정 코난, 名探偵 コナン,1994~> TVA 기준 286-288화 에피소드 <쿠도 신이치 뉴욕의 사건>에서 주인공 쿠도 신이치가 자신을 죽이려던 범인을 구하면서 뱉는 대사. 원문은 “わけなんているのかよ。人が人を殺す動機なんか知ったこっちゃねぇが、人が人を助ける理由に論理的な思考は存在しねぇだろ。”로 “이유 같은 것이 있겠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이유에는 논리적인 사고가 존재하지 않아.”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