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쭈니의 성장기 그리고 찾아온,
2010.02.16
2022.01.11
함박눈 내리는 겨울날 왔다가, 눈 녹은 겨울날 떠난 너를 떠올리며.
마음속에 남겨진 너의 발자국에 살포시 내 손을 갖다 대어 본다.
남들에 비해 소심했던 걸음걸이는 하교할 때만큼은 아주 재빨랐다. 하지만 항상 얼마가지 못해 달달한 떡볶이 냄새에 이끌려 학교 앞 분식집에서 멈췄다. 천 원짜리 컵볶이를 시키며 계란 하나, 만두 두 개를 추가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문방구 앞에서 하나. 파란불을 기다리며 하나. 그렇게 야금야금 먹다 보면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할 때쯤 마지막 계란하나가 남는다. 하이라이트다. 계란을 얇은 꼬치로 힘겹게 으깨서 떡볶이 국물과 함께 마시면 행복한 기분과 함께 어느새 집에 도착한다.
도착한 집에서는 텅 빈 공기에 엄마가 켜놓고 간 라디오에서 열심히 연기하는 성우들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다. 약간 어두운 공기에 온기하나 없는 집, 가방을 벗고 습관처럼 괜히 냉장고도 한번 열어보고,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티비를 켠다. 고요했던 집안은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차고 어느새 나는 재미있는 만화에 빠져 공허한 마음을 잊은 채 조금은 행복해진다.
나의 이런 소소한 루틴이 깨진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었다.
어느 때처럼 학교에서 돌아와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티비를 보고 숙제를 하고 과자를 먹고.. 5시가 넘어간다. 보통 이쯤 되면 엄마가 올 타이밍인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언제 오는지 궁금한 마음에 전화를 건다. 엄마는 바쁘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고 왜인지 모를 서운한 마음에 약간 짜증이 났다. 30분이 지나서일까 ‘삐삐삐삐-’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어딜 갔다가 이제와 왔냐며 투정을 부리려던 나의 얼굴은 예상치 못한 광경에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바뀌었다.
2010년 2월 16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신나게 웃는 엄마 품 안에서 꼬물꼬물 조그맣게 움직이던 강아지를.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나에게, 엄마는 아빠 몰래 사고를 쳤다며 그 애를 보여줬다. 태어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은 아이였다. 종이처럼 가볍고 두 손에 겨우 찰만큼 작았다. 만지면 부러질까 함부로 만질 수조차 없었고 그 조그만 몸은 낯선 우리 집 거실을 총총총 활보하며 돌아다녔다. 모든 것이 신기하다는 듯이 킁킁 냄새를 맡는 아이를 나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날은, 조금은 비어있던 우리 가족의 마음에 한 공간을 채워줄 중요한 존재가 찾아온 날이었다. 그리고 소심하고 외로웠던 내 삶을 바꿔줄 또 다른 시작이기도 했다.
그다음 날부터는 나의 하루들이 그렇게 외롭지 않았던 것 같다.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기는 존재가 있었고, 온기를 가진 무언가가 내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내 간식을 먹으면서 네 간식도 챙겨주고, 가끔은 뺏는 척 장난을 치고, 이름을 부르고 문 뒤에 숨는 숨바꼭질도 하고, 인형을 물고 나에게 다가오면 뺏는 척 연기를 하며 놀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친한 친구가 되고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건드리며 킥킥댔던 하루들도 있었고, 또 너무 우울하고 슬픈 날에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소연하듯이 다 말하곤 했다. 그러면 너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얘기를 하다가 서러워서 눈물이 나면 수제비 같은 두 귀가 나의 눈물 적신 베개가 되어주곤 했다. 그리고 어린 마음에 일부러 장난을 치고 바보같이 속는 착한 너를 보며 다시 웃기도 했다.
그렇게 나의 가장 친한 친구, 쭈니가 생겼다.
우리 집은 사랑은 많지만 소통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생각해 보면 말을 많이 하고 싶던 아이였는데 부모님이 바쁘기도 했고 그걸 들어줄 마음이 크게 없었어서 허공에 말을 할 때가 많았다. (사실 대상자는 있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 허공에 떠도는 말이 되었다.) 이걸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또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무반응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찾은 해결방안은 쭈니였다. 원래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니까 나도 아무렇지 않게 내 말만 하고 쭈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엎드려 있으면 그게 대화였다. 쭈니는 말할 곳 없는 나의 대나무숲이자 소심한 나의 고민상담소였고 어디에도 하지 못했던 모든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였다. 사실 별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힘들었던 얘기, 엄마에게 서운했던 얘기 그런 속상했던 일들을 말하고 그러다가 또 눈물이 나면 쭈니의 부스스한 꼬리로 나의 눈물을 닦곤 했다.
개팔자가 상팔자라라고 했던가. 맨날 누워있는 쭈니가 얼마나 부럽던지, 어렸을 땐 항상 개가 되고 싶었다.
사실 나는 인프피다. 세상의 모든 인프피가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특히 걱정도 많고 생각도 많고 두려움도 많았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암울이 내 것이고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들고 내가 제일 불쌍했던 때가 있던 것 같다. 그게 아마도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하기 싫은 공부를 매일매일 해야 하는 삶이 답답하고 피곤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개월간 갈 수 있는 대학을 걱정해야 했고 학원숙제는 또 얼마나 많은지 밤늦게 까지 했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지 집에 포근히 누워 색-색- 숨 쉬는 쭈니가 너무 얄밉고 부러웠다. ‘나는 이렇게 고생하는데 저렇게 편안하게 누워있다니..’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쳐서 쉬고 싶을 땐 쭈니를 베개 삼아 잠깐 누워 쉬곤 했다. 개집이 더러운 것도 무시하고 머리를 비벼대며 그 온기가 좋아 한참을 괴롭히다가 다시 공부를 하러 방으로 들어갔었다.
고등학교 때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장면 중 가장 여운이 오래 남는 장면이 있다. 한창 체육대회 연습이 있었던 시즌이다. 나는 공을 무서워하지만 딱히 잘하는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발야구 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선배들과 같이 하는 대회라서 열심히 준비해야 했다. 여고에서는 체육대회가 꽤 큰 축제였기 때문에 점심시간도 반납하고 매일같이 연습을 했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쉽게 극복이 되지 않는 법.. 공을 잘 받지 못해 실수가 생겼고 기가 아주 센 선배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와 격양된 얼굴로 화를 내어 무섭고 속상해 울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게 조금은 침울해져 있는 상태로 수업에 들어갔다. 진로시간이었다. 그날은 자신이 최근에 저지른 실수를 적고 내가 나에게 한말과 남이 그 실수를 했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했을 말을 적는 활동을 했다.
나는 당연히 점심시간에 있었던 실수를 적었고, 나 스스로에게는 ‘바보야. 왜 그것밖에 못해. 좀 더 잘했어야지.’라고 말했고 남이었다면 ‘괜찮아. 그럴 수 있어.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했다. 진로선생님이 나의 활동지를 유심히 보시더니 한마디를 하셨다.
‘네가 남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사실은 네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그때의 감정을 정확하게 기억하자면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면서 목이 턱 막히고 눈물이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조차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닌 나를 탓하는 말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내가 배운 건, 나를 탓하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면 그러지 말고 나를 위하는 말을 더 많이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 줘야 남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가끔 나에게도 아무에게도 사랑받고 있지 않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한순간에 우울함이 몰려오면서 무기력과 절망감 공허함 그 어딘가의 감정이 생긴다. 그럴 때 내가 극복한 방법은 옛날에는 쭈니를 보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보는 것이다. 사랑의 초점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서 찾는 것이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찾아서 그걸 하거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하거나, 나만의 소울푸드가 있다면 그걸 먹고 조금씩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씩 찾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이 세상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된다.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작은 점이 아니라, 이 큰 세상도 담을 수 있는 내가 된다.
사실 방금 말한 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고. 나도 내 인생 최고의 암흑기가 있었다. 아마도 갓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던 것 같다. 첫 타지생활, 첫 자취, 첫 교회, 첫 대학교. 어느 것 하나 처음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땐 집 밖에 나가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웠는지 화장을 하지 않으면 편의점도 나가기 어려워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마 성남시(당시 거주지역)에게 잘 보이고 싶었나 보다.
설렘 반 두려움 반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이라는 게 가장 설레기도 한 단어지만 그 설렘만큼 실망도 큰 법이었다. 대관령을 넘어서면 재밌는 일들만 생길 줄 알았지만 아는 곳이 아무것도 없는 동떨어진 곳은 생각보다 적응하기 어려웠고 집안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치우는 것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쓰레기장 같은 집에 살게 되었다. 집 상태가 안 좋으면 실제 정신상 태도 안 좋아진다는 걸 그때 알게 됐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 완전히 정착한 친구를 사귈 때까지 꽤 스트레스를 받았고 우리 집 냉장고는 먹다 남은 엽떡과 안 먹은 치킨무로 가득 찼다. 압박이 너무 크게 다가올 때는 엽떡을 삼키다시피 넘겨버리고 바닥에 있는 물건을 주우려 고개를 숙였을 때 그게 식도로 올라와 바로 토를 하러 간 적이 있었다.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풀어버렸던 나는 내 몸을 학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었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엽떡이 좋은 이유는 미운 정이 들었나 보다.)
나의 스트레스들을 밀봉한 냉장고와
몇 년의 먼지가 쌓인 집
다 쓴 샴푸통이 여러 개 널려있고
전구는 다 나가서 어두운 화장실
자꾸 어디선가 나오는 벌레들
그 안에서 자고 먹는 나
이것이 그때 거기서 살던 나의 모습이다.
혹시나 지금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일어나서 청소하길 바란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도 하고, 쌓아두지 말고 버릴 건 버리고, 바닥도 한번 쓸고, 창문도 한번 열어보길 바란다. 대신 절대로 자기 자신을 비난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그 누구도 스스로를 싫어하고 괴롭힐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어느 순간 그렇게 되어버린 거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니 자연스럽게 나오면 된다. 생각 없이 청소를 하다 보면 땀도 나고 집이 깨끗해지면서 기분도 좋아질 것이다. 하나씩 삶을 정돈해 나가는 것이다. 어질러진 건 치우고 잘못된 건 고치고 거리적 거리던 건 버리고.
미래의 나는 과거보다 나보다 나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위에 살고 있고 매분 매초 미래가 과거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린 별로인 존재가 아니라 별로였던 존재라는 것이다. 절대로 현재가 별로 일순 없다. 별로였던 과거의 나만 존재할 뿐이다.
다시 쭈니 얘기로 돌아와 보자.
그렇게 힘들게 사는 동안 강릉에 내려가 쭈니를 보는 건 나의 확실한 행복이었다. 그때는 야탑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본가에 내려갔는데, 항상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쭈니와 부모님이 마중을 나왔다. 그러면 길 건너 창문 사이로 하얗고 조그만 얼굴이 보였다. 반기는 게 맞는지 뚱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안 보이는 곳에서 꼬리는 바빴었다. 그럼 딱 5초 좋아해 준 것 같다. 바로 관심 밖이 된다. 그럼 뭐 어떤가. 오랜만에 만지는 부드러운 털과 그 꼬순내가 나에게 진짜 집에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라고 말하지만 좀 더 관심을 끌고 싶어서 항상 집에 내려갈 때마다 작은 인형을 하나씩 사갔다. 은근슬쩍 보여주고 애태우고 찡찡거리면 못 이기는 척 주었다. 그럼 1시간 뒤 인형이 침에 절여져서 나뒹굴고 있다. 그렇게 버려질 걸 알지만 잠깐이라도 관심 가지고 좋아하는 그 모습이 좋아서 계속 사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