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순번 10] 수정란 만날 날 기다리며
아이를 기다리는 여성이라면 형형색색 한 아가옷에 둘러 쌓여 얼굴만 바깥세상에 내놓은 채 엄마 품에 안겨 지나가는 12개월 채 안된 아기 모습만 봐도 미소가 절로 지어질 것이다.
이제는 꽤나 커서 꽃이나 나무 같은 주변을 참견해 가며 천진스럽게 걷는 초등학교 저학년쯤 된 어린아이를 봐도 마음이 설레고 눈이 한 번 더 간다.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만 봐도 사랑스럽고 부모 미소가 지어지는 건 본능 같다.
잠시 후 ‘저만큼 키우려면 지금 낳아도 10년은 걸릴 텐데’라는 현실적인 아픔이 행복감을 덮기 전까지 말이다.
난자와 정자를 채취해 놓고 왔는데 두 세포가 만나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다.
채취한 날부터 배아 이식까지 기간. 줄여서 ‘배양 기간’이라고 하는 시간이다.
몸 안에서 일어날 일이 의학의 힘을 빌려 연구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수정란은 최상의 환경에서 자라고 있지만 그들이 잘 자라는 건 누구도 손을 써줄 수 없다. 세포들 스스로 해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식을 앞두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배아가 잘 자라고 있다’라고 긍정의 암시를 거는 것.
남편과 나는 어느 때부턴가 길을 걷다 보게 되는 유아, 어린이, 청소년을 대하는 반응이 매우 자상해졌다.
마치 아이 키우는 부모인 것처럼. 행동 하나하나에 사랑스러운 눈길과 따스한 미소를 보내곤 한다.
여기에 남편보다 내가 하나 더 드는 생각은 저들도 초창기에는 병원 연구실에서 키우고 있는 것과 같은 작은 세포였겠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아이들을 향한 엄마 미소는 꽤나 보편적인 모양이다.
카무니악이라 불리는 케냐 암사자가 새끼 영양을 보고 잡아먹지 않고 입양해서 키웠다는 이야기나,
어미 표범이 개코원숭이를 사냥한 후 그 원숭이에 매달려 있던 아기 원숭이를 식사거리로 삼는 대신 나무 위로 데려가 밤새 지켜주기도 했던 놀라운 일들은 보면 말이다. *
최상위 포식자라 불리는 맹수들이 어찌 그런 세심한 배려와 같은 행동을 했을까 싶다.
물론 새끼를 오랜 기간 키워야 하거나 혹은 돌보는 데 손이 많은 경우에는 이런 일이 드물다고는 한다. *
그래도 인간이 아니라 동물 사례이긴 하나 눈여겨볼 만하다. 인간은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겠지.
어쩌면 아이를 보고 미소 지어지는 건 성인의 본능일 수도 있지만 아이가 발산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피부는 뽀얗고 눈동자는 크고 맑으며 팔다리는 통통하고 어딘가 어설프게 행동하는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작은 사람.
그게 내 유전자 반을 가지고 태어난 개체라면 모든 걸 걸고 키워보는 것. 그게 모성애 부성애 아닐까.
며칠이라는 기간 내 몸을 대신하여 연구실에서 자라주고 있는 세포(아니 자식)들이 태어날 아기처럼 생각되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크리스마스 기운이 다소 남아 있고 라디오나 길거리 전광판에는 해피뉴이어가 공존하는 2022년 마지막을 하루 이틀 남긴 차분한 날이다.
단백질 위주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며 소고기와 두유를 매일 먹으며 이식 날을 하루하루 기다리고 있다.
음식과 착상은 관련이 없다고 하나 이를 완전히 간과할 수도 없는 것이 난임 치료자들 심정이다.
또 애써 찾아 먹는 것과 반대 행동도 한다. 임신 시에는 복용해서는 안된다고 설명서에 적혀 있는 영양제는 이때부터 중단한다.
이렇게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아야 할 것을 조심조심 구분하며 이식 날이 다가오고 있다.
임신해서 몸이 무거워지면 머리 손질하러 미용실 다니기도 힘들겠지 싶어 12월 마지막 날에는 머리도 단정히 잘랐다.
미용실에 앉아 있는 동안 이식 날짜 알려주는 전화가 병원에서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가운 안에 들어있는 손 안에는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머리 예쁘게 다듬고 집에 와서 전화를 받긴 했지만 이런 건 중요치 않다. 이식 날짜가 정해졌다는 것.
새해 첫 시작인 1월 2일에는 배아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자식을 품을 날이 며칠 안 남았다.
기나긴 코로나 시국이 끝나가자 여기저기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열었다.
뜻밖에 예술의 전당 마당에서 불꽃을 터뜨린다기에 예쁘게 머리 한 날인 31일 밤엔 늦은 시간에도 해야 할 일이 남게 됐다.
하늘을 휘어 감는 불꽃을 보며 소원 빌어야지. 소원은 당연히 배아 착상이다.
단단히 붙으라고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생각에 한겨울 밤 추위 속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어릴 때 봤던 그저 펑펑 터뜨리는 것에 의미를 둔 듯한 불꽃놀이와는 비교가 안되게 화려했고 불꽃을 받쳐주는 음악은 웅장하면서도 흥이 있었다.
나를 위해 터뜨려주는 불꽃놀이라는 마음으로 눈을 떼지 않고 끝까지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빌었다.
한 해는 넘어갔고 곧 배아를 만나러 간다.
배아? 세포? 수정란? 아니다. 자식 같다.
이제 곧 만나러 갈 생명체는 내 자식이다. 설레는 기쁨으로 행복에 겨운 해의 마지막과 시작이다.
#수정결과 #예쁜배아들 #8개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 Mothers and Others 상호 이해의 진화적 기원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유지현 옮김. 2021. 에이도스)
책에는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p. 304~306)
: 중북부 케냐에서 카무니악이라고 불리는 진짜 암사자가 새끼 영양을 잡아먹지 않고 입양하더니, 계속해서 모두 5마리의 새끼 영양을 입양했다. 그중 한 마리는 결국 그 암사자가 잡아먹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른 네 마리는 굶주림으로 결국 죽거나, 필사적인 어미 영양이 새끼를 다시 되찾아갈 때까지 이 무차별적인 모성애를 발휘하는 암사자에 의해 자상하게 양육되었다. 나이로비에서 돌아온 유네스코 관리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그 암사자는 “분명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어미 표범이 개코원숭이를 죽인 다음 사냥감에 매달려 있는 아기 원숭이를 발견한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작은 개코원숭이는 울부짖었고, 우리는 곧 크게 와그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표범이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신, 아기 개코원숭이가 발을 내디뎌 표범을 향해 걸어왔다. (표범은) 아기 원숭이의 목덜미를 살며시 입에 물고, 나무 위로 새끼를 데려갔다.” 그 양어머니는 밤새 새끼를 지켰지만, 다음날 아침 새끼는 이미 죽어 있었다.아마도 굶주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표범은 여전히 죽은 새끼를 지키고 있었다.
: 심지어 자신의 새끼가 있는 어미들도 종종 또 다른 새끼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새끼를 오랜 기간 동안 키워야 하는 혹은 돌보는 데 손이 많이 가는 경우에는 그런 일이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