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즈, 볼리비아
그날의 공기와 조명은 기억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함께 웃고, 함께 마셨던 그 밤의 잔상이 마음 깊은 곳에 잔잔히 퍼져 있던 주간이었다. 그날 이후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기에 아침식사 자리에 잘 참여하지 못했다. 더구나 준과 료타는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일본인 동료들과의 모임이 잦았기에 같은 집에 살고 있지만 그들을 마주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주말이 돌아왔다. 늦은 시간에 일어나고 싶었지만, 이미 일찍 눈이 떠지는게 습관이 되어버렸기에 아침 식사시간에 맞춰 일어날 수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눈을 부비며 걸어갔다. 작은 식탁 위에는 미리 차려진 간단한 아침이 놓여 있었고 그는 늘 그렇듯 창 쪽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직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피가 반쯤 차 있는 잔이 그의 오른편에 놓여 있었고 그가 구운 듯한 토스트 한 조각이 반쯤 베어 물린 채 접시 위에 남겨져 있었다.
“좋은 아침이야.”
나는 식탁 위에 놓여있던 따뜻한 우유에 커피가루를 섞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그는 잔잔한 눈빛으로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좋은 아침! 오랜만이다.”
그의 말투는 느긋하고 낮았다. 자고 일어난 얼굴이었지만, 눈가엔 어딘가 기분 좋은 여운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반응하듯 잔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를 마주 보는 순간, 문득 유키네 거실에서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밤이 떠올랐다. 그 밤 이후,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침이었다.
“조금 있다가 샌프란시스코 성당 근처에 나갈 건데, 혹시 시간 돼?”
그는 내가 앉자마자 그 어떤 정적도 없이 외출을 제안했다. 나는 그의 눈을 잠시 쳐다보다가 손을 뻗어 식빵을 가져와 잼을 발랐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같이 가자.”
창밖의 햇살이 벽에 길게 드리워졌고, 그는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따라가다가 내 앞에 놓인 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을 척 했지만, 그 순간 심장이 평소보다 조금 더 빨리 뛰었다.
오후 11시 즈음 집을 나선 나와 그는 함께 작은 미니버스를 탔다. 좁고 낡은 좌석,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빛,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레게톤 음악. 그는 창가에 앉아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조심스레 두드리며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많이 들어오지 않게 살짝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먼지와 함께 햇살이 흩어졌다.
“아아, 많이 흔들린다.”
그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매가 반쯤 접혔고,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가 보였다.
"그러게."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릴게요!"
버스가 샌프란시스코 성당 앞 경사로에 멈췄다. 나와 그는 기사에게 동전을 건넨 후 내렸다. 발을 내디딘 순간, 거리의 온도와 소음이 확 밀려왔다. 쨍한 햇빛, 사람들의 웅성거림, 착즙 오렌지 주스와 알록달록 쨍한 색깔의 음료를 판매하는 노점상이 곳곳에 보였다. 광장은 북적였고, 그 가운데 거대한 성당이 묵직하게 서 있었다. 돌로 지어진 외벽과 섬세한 조각들이 햇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성당 앞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간 그는 잠시 건물을 올려다보다 내게 말했다.
“사진 찍어줄게.”
나는 작게 웃으며 거대한 건축물 앞에 섰고, 그는 뒷걸음질치며 앵글을 잡았다. '찰칵' 하는 소리가 몇 번 울렸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나왔다.”
나는 그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 보다 다른 사람이나 풍경을 담는 것을 좋아한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쪽으로 올라가볼까?"
나와 그는 성당 옆 경사진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기념품 가게들이 쭉 이어져 있었고, 알록달록한 판초와 라마 인형, 손으로 짠 팔찌와 여행객들이 살만한 마그넷들이 보였다. 상인들은 스페인어로 손짓하며 말을 걸었지만 그저 눈빛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자 냄새가 바뀌었다. 마른 흙 냄새, 허브와 향신료 등 비릿한 향이 섞여 있었다. 마녀시장, Mercado de las brujas에 도착한 것이다. 낯선 물건들이 질서 없이 놓여 있는 상점들이 길을 따라 쭉 늘어있었고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는 한 가게를 보며 말했다.
“저거 봐. 말린 라마야.”
“헉, 진짜네. 저기도 있어.”
그의 입꼬리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어린 소년처럼 이 곳 저 곳을 구경했다. 그러던 중 담아온 물을 다 마셔서 빈통을 들고 다니던 내가 물을 살 수 있는 곳이 없을까 돌아보겠다고 하자 그가 집을 나서기 전에 찾아본 카페에 가서 점심을 먹자며 길을 안내했다.
'Cafe del Mundo.'
처음 방문한 그곳 앞에 잠시 멈춰 서자 그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카페 안은 커피 향으로 가득했다. 정면에 주문 카운터가 있었고, 유리 진열대엔 케이크와 초콜릿 쿠키가 놓여 있었다.
"안녕하세요."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그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공간 앞에서도 편안해 보였다. 그는 퀴노아 샐러드와 코카잎차, 나는 렌틸 수프와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1층에서 주문을 마친 후, 나무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1.5층에는 빈백과 담요가 있는 쉼터 공간이 펼쳐져 있었는데, 큰 배낭을 옆에 두고 앉아 대화를 나누는 여행자들이 많이 보였다. 그와 나는 2층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에도 많은 여행자들이 앉아있었지만 창가 자리가 비어있어서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와 나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별 다른 말 없이 조용히 주변의 소음을 즐겼다.
"우와! 맛있겠다."
곧 음식이 나왔고 나는 언제나처럼 휴대폰 카메라로 음식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는 나를 보던 그는 잠시 기다려주었다.
"아차, 고마워."
"별말씀을. "
그가 웃으며 말했지만 나는 괜히 머쓱했다. 내가 휴대폰 카메라를 내려놓자, 그제야 찻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고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서는 여기 왜 오게 된거야? 이제야 물어보는거 같아."
그의 물음에 나는 아메리카노 잔을 내려두며 대답했다.
"아, 나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했어. 한국에서 일을 해본 경험은 인턴 3개월 정도인데, 졸업하니깐 내가 뭘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 그러다가 이 곳에서 일할 수있는 기회가 생겨서 왔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샐러드를 한 입 먹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오사카 IT제품 회사에서 물류 쪽 일하다가 이 곳에 지역 마케팅 봉사활동을 1년 다녀오면 본사의 마케팅 부서로 옮길 수 있다는 조건이 있어서 왔어. 운 좋게 뽑혀서 온 거야."
"멋지다. 너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이곳에 오기로 한 거구나.".
"응."
그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동안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테이블 위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고 나와 그는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은 어때? 익숙해졌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처음엔 낯설었는데, 아이들 이름도 하나씩 외워지고, 동료들도 다 잘 도와줘."
"다행이다."
나는 문득 이 짧은 점심이 서로를 조금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언제 사마이파타로 떠난다고 했지?"
"이제 한 달 정도 남았어."
"그렇구나."
그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유리컵 가장자리에 묻은 라임 드레싱 자국을 손끝으로 조용히 닦아주었다. 그의 행동에 나는 컵과 그를 번갈아 봤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나 사실 처음에 너를 네 방 앞에서 봤을 때, 조금 무서웠어(miedo)."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서웠어? 왜? 내가 무섭게 생겼어?"
그는 내 반응에 본인의 단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수정했다.
"아니, 아니, 음... 아, 긴장했었어(nervioso)."
"아하, 왜?"
그리곤 샐러드의 풀어진 퀴노아를 포크로 하나하나 건드리면서 다시 대답했다.
"그냥... 낯선 사람이랑 매일 같은 공간을 나눈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근데 네가 매일 아침 먼저 인사해줘서 금방 편해졌어."
그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고마움이 느껴졌다. 나는 스푼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랬구나. 나는 오히려 첫 날 저녁 같이 먹을 때, 네가 많이 조용해서 다가가기 어렵겠다는 생각했었는데... 그런데 이번에 유키네 집에 데려가줘서 고마웠어. 너 덕분에 외롭지 않은 한 주를 보내고 있어."
내 말에 그는 반달 눈을 하며 말했다.
"다행이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우리 같이 라파즈 곳곳을 여행해보자."
그리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