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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 Feb 25. 2017

졸업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생활 돌아보기.



나는 19년을 가족들과 살아가면서 이런 생각을 했었다.

 '벗어나고싶다.'

아니 사실은 고등학교 입시 때 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이 집안에서 좀 벗어나보자, 제발 내 혼자서 새롭게,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나로서 살아보고싶다. 그런 마음을 진심으로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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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프게도 나는 20살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계속 꿈꿔왔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시기'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친언니들과 함께 지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다.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려고 했었던 나의 시도는 '돈'이라는 현실에 부딪혀서 언니들이 있는 같은 도시로 대학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웃긴 사실은 대학 4년 내내 학자금대출을 줄곧 받았는데 왜 굳이 타 지역으로 대학을 가지 못하게 했냐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언니들과 함께 한 지역에서 한 집에서 살아가면서 2년을 살았다. 가족들의 품에 있었기 때문에 편안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 자아를 찾기위한 도전을 막는 환경이었기에 오로지 '나' 자신만의 성장을 멈추게 했던 시기였다.

처음, 남자를 만나게 될 뻔(?)한 순간에도 중간엔 벽처럼 언니들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 생각해도 나쁜 XX의 전형이었는데, 어쩌면 그렇게 언니들의 있었기에 내게 그들이 좋은 방어막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씩은 만약 그 때 내가 그 사람과 만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돌아보면 그 사람을 생각하면서 혼자 끄적였던 글들도 꽤 많았다. 혼자 상상하면서, 혼자 그 사람을 그리면서, 혼자 마음아파하면서 썼던 글들이 참 많기도 했다. 20살의 나는 정말 뭐든 아무것도 모른채로 살아갔던 것 같다, 심지어 '나'에 대해서까지도.

 21살의 나는 그렇게 아무것도 몰랐던 20살의 나에 대해서 한 번 찾아보려고 그렇게 애썼다. 그 때 처음으로 '혼자'서 무언가를 해 내려고 엄청 발버둥쳤다. 20살이 되었을 때도 나는 가족들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었기 때문에 어쩌면 홀로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해에 나는 혼자서 4박 5일 간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했다. 하루에 약 30-40KM를 자전거로만 주행했다. 정말 온 다리에 멍이 들 정도로 많이 넘어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는 못 할 짓이지만 그 때 처음으로 내 삶의 방향성을 찾기 시작했다. '도전 정신'. 그것 하나로 1년을 살아갔다. 굴지 대기업의 대외활동에도 여러 번 참여했고 활동을 하면서 기업 내에서 주는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 자존감도 자신감도 높여나갔다. 그러나 말 그대로 대외활동에 치중했기 때문에 교내에서는 활동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대학교 친구들을 많이 사귀지 못했었다. 아무튼 그 때 나는 갑작스럽게 200명이 넘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갖게 되고 그들의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꽤 큰 혼란을 주었다. 인맥관리에 과부하라는 말이 딱 적당하겠다. 나는 그 때 그렇게 다양하고 멋있는 사람들을, 그 모두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을 가졌고 그래서 나는 22살, 휴학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당시에 그 모두를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먼저 손을 내밀고 연락하곤 했었는데 아, 그게 얼마나 상대방들이 부담스럽게 느끼는 것인지 심지어 내가 그들에게 민폐가 되기도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왜 그 땐 몰랐고 지금에야 깨닫게 되었을까. 

 나의 22살의 기록은 지난번에 썼던 '답답해서 적는 글'에 담겨있다. 인생에서 겪을 모든 희로애락을 그 1년 동안 한꺼번에 맛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말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어쩌면 '다시 그 일을 할 수있겠니?'라고 누군가 내게 물어본다면 나는 '아니요, 다시는, 절대로 그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도 않고요, 그 사람들하고 상종하기도 싫어요.' 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로 다시는 되풀이 하고싶지 않다. 물론 가시밭에도 듬성듬성 꽃은 피어있다고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좋은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워낙에 힘든 순간들이었기 때문에 그 꽃들에게도 연락을 주고 받을 마음의 여유가 내겐 있지 않았다. 가끔 그 사람들에게로부터 연락이 오면 받기는 했지만 내가 굳이 먼저 연락하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지금도 그렇고.

그렇게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싶은 한 해를 보내고 23살이 되어 복학을 했을 때 나는 자존감이 바닥치고 보기 흉해긴 내 몸과 얼굴을 다시 되돌려 놓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나를 다시 사랑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모르겠다. 그 땐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말투에도 얼마나 신경이 곤두섰었던지, 22살의 내 연장선이었는데 정말 그 때를 다시 생각해도 나는 절대로, 다시는 돌아가고싶지 않다. 아무튼 나는 조금씩 변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래, 나를 얼마나 어루어 만졌던지...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다른 대외활동은 눈에 넣지도 않았었다. 그저 운동을 했고 전공과목 공부를 더 많이 했고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신감을 되찾을 무렵, 교내에서 진행하는 활동을 알게 되었고 지원하였다. 그렇게 24살을 준비했다.

그리고 2016년, 24살이 되었을 때 무역을 공부하게 되었고 관련 교내활동도 1년간 진행했다. 일을 하면서 친구들을 많이 알게되었고 그 중에서도 5명은 내가 가장 솔직해질 수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들이 되었다. 돌아보면 2016년은 대학교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한해이자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한 해였음에 틀림없다. '적을 만들지 말아야 해.'라는 글의 주인공인 그 인간을 만나서 끔찍했지만 반면 그 덕분에 우린 더 끈끈해질 수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원래 누군가의 욕을 하면서 서로서로 응집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이다.)

어느 때보다도 바쁘게 지냈고 정말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도모하며 산다는 것이 무슨 삶인지를 알게 해준 한 해였다. 성취감이 어떤 것인지 다시 한 번 알게 해준 한 해, 나의 2016년, 나의 24살, 나의 4학년이었다.

고마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처음, 처음이라는 그 단어를 많이 만들어준 순간들이었다. 처음. 처음이라는 그 말을 설레하면서 혹은 슬퍼하면서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그랬기에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자취방의 짐 정리를 할 때 더 눈물이 났고 더 아쉽고 서운하기도했던 그런, 한 해였다. 그 친구들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그냥 나에겐 2016년, 나의 24살이었기에, 그 친구들이 없다면 내 24살도 없었을 것이기에, 그래서 더 그립고, 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졸업을 했다.

나에게 대학 생활은 도전, 아픔, 성취, 친구 이렇게 나열할 수있겠다. 물론 설렘도 있었지만 큰 부분이 아니었기에 앞으로 내 인생의 키워드에 쓸 수있길 바란다. 어쨋든 나는 졸업을 했다. 졸업식날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었을 때, 그 느낌이란...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슬프기도하고 막막하기도하고, 참 복합적이었다. 그 날 나는 내 친구들과 함께 술을 진탕 마셨는데 저녁식사 시간에 왜인지  마음이 울적해지고 눈물이 날 것같았더랬다. 복합적인 심정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졸업 축하한다는 말을 기쁘게 해주었지만 졸업은 곧 백수라는 말이 현실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아무튼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난 졸업을 했는걸.

그래, 그렇게 나는 소속감이라는 것이 사라졌지만 억지로 만들어보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친구들의 대학 내 스터디 동아리 이름이라던지, 현재 셀프 독서회 이름을 지어본다던지 하는 그런 것...


아무튼, 나는 졸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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