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탄산수 Apr 11. 2024

[D+400] 출산 후 남편과의 공식 첫 데이트!

쓰는 브이로그라고나 할까

오늘은 소소한 일상을 나눌까 한다. 오늘은 아이가 세상에 나온 지 400일이며, 남편과 데이트를 재개한 날이다. 잠깐 단둘이 커피 마신 적은 있지만 온종일 둘만 붙어있는 시간은 오늘이 공식적으로(?) 처음이다. 아이를 키우며 둘이 속 얘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아 어젯밤에는 어떤 말을 나눌까 고민하는 잠깐의 설렘도 느꼈다.

데이트 첫 코스는 남편의 연차 사유기도 한 은행이었다. 남편이 신생아 특례대출을 알아보는 동안 나는 창구 뒤에 앉아 브런치 맛집을 검색했다. 그러다 파주 헤이리 마을에 맛있는 터키 음식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손님들의 리뷰에 진정성이 느껴져서 이곳에 가자고 카리스마 있게 남편을 이끌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매장에 '연두'라는 강아지가 돌아 다닌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는 (크건 작건 상관없이) 강아지를 무서워한다. 입구에 도착해 매장 문을 슬쩍 들여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흰색 털을 가진 조그만 강아지가 한 가운데 떡하니 앉아있었다. 저 귀여운 강아지가 왜 무서운 건지 나도 이해되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무서운 것을. 아침부터 나 때문에 강아지의 행동 반경을 제한하고 싶지 않아 포기하려고 했지만, 여러 번 슬퍼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나서서 주인분께 양해를 구해주었다.

(강아지에게는 자유를 뺏어 미안했지만)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알록달록한 색감과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기분이 환해졌다. 그리고 직원분의 상냥함도 환해진 기분을 더 밝혀주었다. 좋아하는 나를 보며 남편이 핸드폰을 들어 앉아있는 나를 찍어주니 진짜 옛날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음식 맛도 끝내줬다. 10년 동안 터키에 거주한 사장님이 연 가게로 최근에도 터키 여행을 다녀와 메뉴까지 리뉴얼했다는 사전 정보를 알고 있어 그랬던 걸까. 피쉬&카이막, 메네멘, 시시케밥 이름마저 생소한 음식을 시켜놓고 살짝 걱정스런 마음이었는데, 비주얼부터 맛까지 감탄스러웠다. 무엇보다 음식에 정성스러움이 느껴져서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애 낳고 부부끼리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로 추천한다ㅎㅎ)


맛있는 식사를 하고 우리는 마을을 돌다 한 카페로 들어갔다. 이른 점심을 먹고 나와 카페에는 아직 손님이 1명도 없었다. 2층까지 층고가 뻥 뚫린 카페 한 가운데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내 속으로는 퇴사하고 내가 어떤 생각과 계획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 시시콜콜 말하고 싶었는데, 정작 뭐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지, 두루뭉술한 이야기만 하게 됐다. 그러다 남편에게 저녁마다 1시간씩 책을 읽자고 훈계 아닌 훈계(?)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훈계는 다음 데이트 코스로 이어졌다. 내가 가고 싶어 저장해둔 파주 출판단지 북카페로 우리는 이동했다. 그곳은 차를 마시며 비치된 모든 중고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보다도 커피를 마셨는데 또 새로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사실이 나만의 설렘 포인트였다. 데이트 중 가장 설렜던 순간인 것은 안 비밀이다. 아메리카노에 이어 이번엔 달달한 카페모카를 시켜놓고 남편은 경제 경영 코너를, 나는 심리 철학 에세이 코너를 어슬렁거렸다. 그리곤 책 취향처럼 다른 장소에 앉아(남편은 소파, 나는 각진 의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선학이 궁금해 '선학의 이해'라는 책을 잠시 읽다가, '카모메 식당'을 쓴 무레 요코의 '지갑의 속삭임'이라는 에세이집을 읽다가 공자와 맹자의 철학집을 읽다가, '거의 정반대의 행복'이라는 만화가 '난다'의 책을 읽게 되었다. 작가님의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었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공감이 되고 소소한 이야기에 웃음이 나 남편과의 대화보다 약 20%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데이트를 이어가고 싶어 3,500원에 집으로 책을 모셔왔다. 그래도 책 읽는 남편 뒤통수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으니 완전히 배신은 아니다.


아무튼 출산 후 남편과의 첫 데이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연애할 때는 오늘 옷이 잘 어울리는지, 화장이 뜨지는 않았는지 온통 내가 예쁘게 보일지 신경 쓰이는 데이트였다면 이제는 오히려 남편에게 온전히 초점을 맞출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의미있는 데이트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하고싶은 얘기를 몽땅 털어놓지는 못했어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남편의 기색 정도는 눈치챘으니 이정도면 됐다. 온통 아가에게 향하던 눈빛을 오랜만에 서로에게 보내면서 온기를 맞출 수 있었던 오늘에 감사하다!



이전 10화 [D+398] 난 안 된다는 마음을 떨쳐내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