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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냄새 Sep 24. 2024

빌런의 사정

소년은 평범했다. 특별한 능력도, 사람들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그는 그저 배경 속에 묻혀 지냈다. 그의 하루는 늘 똑같았다. 소년이 느끼는 고독은 그 평범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소녀는 달랐다. 소녀는 초능력을 타고난 히어로였다. 세상의 시선은 언제나 그녀에게 머물렀고, 사람들은 그녀를 찬양했다. 소녀는 모두가 동경하는 존재였다.


소년은 소녀를 지켜봤다. 그녀의 존재가 그의 세상을 지배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자신이 평범한 채로는 그녀에게 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작은 장난을 시작했다. 사람들을 놀래키고, 혼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마다 소녀는 나타나 그를 막았다.


소년은 짜릿함을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소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이게 내가 주목받는 방법이구나.” 그는 깨달았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소년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소녀는 소년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녀가 영웅으로 빛나기 위해서는 소년의 악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소년의 악행을 방관했다. 오히려 기다렸다. 소년의 악행이 커질수록, 소녀는 더 빛났다.


시간이 흘러 소년의 행동은 더 이상 작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의 악행은 점점 더 커졌고,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다. 사람들은 소녀가 나서서 그를 막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소년과 소녀의 마지막 결투가 벌어졌다.


소년은 소녀를 쓰러뜨렸다. 그 순간, 소녀의 진짜 의도가 드러났다.


“알고 있었어.” 소년은 고개를 들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소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래, 네가 왜 그랬는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소녀의 말은 그의 혼란을 더 깊게 만들었다. “네가 나에게 주목받고 싶었지. 그래서 너는 빌런이 된 거야. 그리고 난 그걸 원했어.”


그 말은 마치 칼날처럼 소년의 가슴을 찔렀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소년이 저지른 모든 악행은 단지 소녀를 빛나게 하는 도구였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너도 알고 있었어... 날 이용한 거였어.” 소년은 뒤로 물러섰다. “넌 내가 빌런이 되길 바랐던 거야. 그래서 날 멈추지 않았어...”


소녀는 조용히 웃었다. “맞아. 넌 나를 빛나게 하는 존재였어. 내가 영웅으로 빛날 수 있는 건, 네가 빌런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지.”


소년은 소녀를 쓰러뜨렸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녀의 마지막 말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게 정말 네가 원한 거였을까?”


소년은 승리의 감각이 어떤지 기대했지만, 그것은 결코 찾아오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었지만, 그의 가슴 속에는 차가운 공허함만이 자리했다. 소녀의 말이 그를 혼란 속으로 밀어 넣었다.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사람들은 소년이 아니라, 쓰러진 소녀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기를 기대했지만, 그들의 시선은 모두 쓰러진 소녀의 모습에만 머물렀다.


사람들의 속삭임이 소년의 귀에 들어왔다. "소녀가 진짜 빌런이었을까?" "아니, 그 소년이 진짜 빌런일지도 몰라." 사람들은 무관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관심은 소년의 존재가 아닌, 소녀의 패배에만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소년은 자신이 세상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홀로 서 있었다. 빌런을 쓰러뜨린 영웅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를 둘러싼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무의미한 속삭임뿐이었다.


“내가 이기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소년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찾아오지 않았다. 소녀를 쓰러뜨린 순간,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그는 빌런도, 히어로도 아닌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소년이 바라던 것은 단순히 소녀의 관심이 아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소녀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승리 역시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않았다. 세상은 다시 평화를 찾았지만, 그 속에서 소년은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나는 도대체 누구지?”


소년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잃어가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 채, 주변 사람들의 속삭임과 무관심 속에서 자신이 빌런도, 히어로도 아닌 어딘가 중간에 남겨진 존재라는 사실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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