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 2주 간 전에 없던 불안감을 느꼈었다. 조급하니? 진로 상담 끝자락에 교수님이 물었다. 조급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조급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아뇨 딱히 조급한 건 아닌데요. 졸업도 1년 남았고. 어느 정도 조급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불안한 건 이상했다. 다음 달 월세, 밀린 공과금, 돌연변이 같은 내 커리어 뭐 이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을 훨씬 넘어선, 아주 먼 미래에 대한 불신.
2.
지인의 죽음, 유명인의 죽음, 코로나 시기 수도권 2030 여성의 높은 자살률. 이런 것들이 보였다. 나는 어쩌면 저들 중 일부였을지도 모른다고, 뒤늦게 생각했다.
2-1.
나의 일상에 나를 위협하는 것들이 가득하다는 감각. 2주 내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나를 불안하게 한 감각은 '안전할 수 없다'는 감각이었다. 누군가의 평가, 범죄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나를 미약하게 지탱해주고 있는 것들 중 하나만 무너져도 다 무너질 것 같은 기분. 언젠가부터 깨달은 나의 일상적인 불안의 원인들. 어른이 되면 이런 불안은 걷힐 거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2-2.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곳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뛰는 게 더 쉽다. 흔들리는 바닥을 딛고도 꼿꼿하게 버티는 게 더 어렵다. 그런데, 세상이 멈췄다. 더 많이 흔들리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줄 거라 믿었던 것들이 무너지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안정된 직장, 나 하나 잘 수 있는 집,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이런 게 내게 평생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는 위기감. 상상력이 거세당했다.
2-3.
똑같은 기사를 보고도 한 여대 교수는 페미니즘이 여자들을 위기에 빠뜨렸다고 얘기했다. 멍청한 사람. 페미니즘이 없었어도 사람들은 매일 다른 이유로 죽었다.
3.
이런 건 피해 의식이 아니고 현실 의식이라고 부른다. 계급과 젠더가 뒤섞인, 자본주의의 피해자라는 현실 의식. 낮은 곳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감각.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나약하고, 스스로를 지키기도 벅찬 존재라는 것. 아, 이 좆같은 열패감.
나의, 당신의, 우리의 불안감을 안다. 청춘의 병적인 자아를 이해한다. 네 속에서 나를 본다.
4.
그래서 나는.
4-1.
청소를 했다. 해가 들다 마는 넓지 않은 집이지만 움직일 공간을 만들었다. 오래된 겨울 이불과 옷가지를 버렸고 밀린 빨래 돌렸고 오랜만에 캔들을 켰다. 말라가는 화분에 물을 줬다.
4-2.
인스타그램을 좀 덜 봤고 뉴스도 안 봤다. 하루는 일부러 슬픈 영상들을 막 틀어놓고 청춘드라마 주인공 마냥 바닥 긁으며 울었고 그러고 나서 일부러 운동했다. 스트레스 주던 자기소개서를 악착같이 완성하고 예전에 즐기던 드라마를 종일 돌려봤다.
4-3.
걸었다. 희성을 불러내서 두어시간 산책을 하기도 하고 맨발로 걷는 엄마 옆에서 벌레 피하며 걷기도 했다. 매일 산책한다는 예은의 산책길을 함께 걸었다.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자전거를 피하며 걸었다.
4-4.
좋은 글들을 읽었다. 삶의 빈틈을 자신이 채우겠다는 주원, 자기를 가두는 말에 굴하지 않는 영은, 불안했던 청춘을 회상하는 정지우, 매일 글을 보내는 이슬아, 함께라면 괜찮을 거라는 김규진의 글을 읽었다. 안 읽던 자기계발서에서 의미 있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했다. 사랑하는 구절을 나누었다.
5.
태양이 말했다. 이 세상은 네 것이 아니다.
어쩌라고. 세상은 어차피 랜덤이야.
5-1.
그래서 나는
살았다. 내일도 화분에 물을 줘야 해서, 아직 어제 보던 드라마를 다 못 봐서, 산책하는 길 바람이 더 선선해질 거라서, 친구가 내일 또 멋진 글을 올려줄지도 몰라서. 이런 핑계들을 아주 많이 만들어두었다가, 삶의 이유를 질문하게 될 때마다 하나씩 꺼내들었다. 세상이 랜덤이라, 일상을 갱신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나쯤 부서져도 안전할 지지대들을 몇 겹씩 쌓아두었다.
5-2.
내가 바라는 건 오로지 안정 뿐인데. 불안정함을 인정하니 안정이 찾아왔다. 삶의 아이러니.
6.
그렇게
버티고 버티고 버티고.
가끔 숨 쉬고.
6-1.
이 감각 잊지 않으면 된다.
다른 걸 발견하면 된다.
현실에 발을 딛고서 다르게 질문하면 된다.
나아갈 방향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을 방법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눈을 가진 우리는, 그렇게 살면 된다.
6-2.
나는 그렇게
살아서, 우울과 씩씩함을 동시에 전시하면 된다.
멈춘 나를 버티게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된다.
7.
우리는
나선으로
걷고 있다.
땡스 투.
나의 레퍼런스들. 덕분에 글을 완성하네요.
※ 015B, 롤링쿼츠의 <Random>을 들으며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