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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phie Nov 04. 2020

묵고재비의 천국, 터키.

[맛있는 터키] #1 프롤로그



어릴 때 나는 편식이 굉장히 심했었는데, 그 편식을 고쳐준 건 바로 세월과 타국 살이었다. 나이가 들며 아삭한 채소의 매력과 재료 본연의 맛들을 즐기게 되었고, 내 나라에서는 당연하던 식재료들의 부재는 그렇게 싫어하던 미역국조차 쌍수를 들고 반기는 음식이 되게 했다.


여전히 입맛에 맛지 않으면 차라리 굶는 편을 택하지만, 그만큼 좋아하는 음식도, 먹고 싶은 음식도 많은 나를 엄마는 '까탈시런 묵고재비'라고 부른다. 종종 그런 내게 미정 씨가 눈을 흘길 때면 난 이렇게 반박하고 싶다. '까탈시런*+묵고재비**'는 정확하게 엄마 아빠를 반반씩 떼어온 결과물이라고!


우리가 어릴 때부터 아빠는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셨다가 맛집을 발견하면 꼭 두세 시간이 걸리는 지역이라도 다시 엄마와 우리를 데리고 가서 맛 보여주고 싶어 하셨는데, 그러다 보니 주말마다 가깝고 먼 도시들로 가족 여행을 떠나곤 했다. 예를 들어 언양이라는 지역에 위치한 한 노포老鋪에서 난생처음 갈매기살을 맛보았던 기억은 아직도 필름을 되감듯 생생하게 머릿속에 재생된다.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맛집' 하나 보고 떠났던 식도락 여행이라니! 이 정도면 요즘 소위 말하는 '프로 맛집러'의 조상 격이다. 그러니 맛있는 거라면 사막 한가운데라도 찾아가던 나의 맛집을 향한 '묵고재비' 본능은 분명 영훈 씨에게서 물려받았음이 틀림없다.


나에게 '까탈스러운 입맛'을 물려준 우리 미정 씨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소개해준 이들마다 너무 맛있어 꿈에도 나오더라는 이스탄불의 살살 녹는 양갈비 집에서도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난다며 한 입 밖에 먹지 못했던 유일한 사람이다. (이 사건은 맛집 리스트에 있어선 누구를 실망시켜본 적이 없던 내 가이드 경력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물론 그녀의 입맛이 이렇게 콧대 높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사실 엄마는 나와 도시락을 먹던 고등학교 동창들이 지금까지도 추억하곤 하는 엄청난 손맛의 소유자다. 주변의 누구나 인정하는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해 시작한 미정 씨의 식당은 4년이 지난 지금 단골들로 북적거리는 동네 맛집이자 아지트로 자리 잡았다. 맛집 사장님인 섬세한 미각의 미정 씨. 그리고 그녀의 음식을 30년간 먹고 자란 나, 자연스레 '까탈시런 묵고재비'가 될 수밖에.


그렇게 부지런히 세계 곳곳에서 맛보고 다닌 식당들, 맛있는 음식들은 내 머릿속에 그리고 지도 앱에 빼곡하게 저장돼있다. 전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장담하건대 그중 적어도 3분의 1은 터키에 있는 곳들이다. 굳이 특정한 가게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생각만으로 배가 고파지는 터키 음식들도 있다. 터키 곳곳의 기억은 곧 내게 맛있는 음식들의 기억이다.


홍합밥의 후추향 가득하고 고슬고슬한 밥알 위에 뿌려진 레몬즙의 상큼함이라던가, 도녜르 케밥에서 닭고기와 함께 씹히는 달짝지근한 토마토와 구운 가지의 맛 같은 것들, 제철 과일만 열심히 먹기에도 1년이 바쁜 다양한 과일들. 아마도 묵고재비인 내가 가장 즐겁게 써내려갈 주제들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 때마다 행복한 추억에 천국을, 터키 음식이 그리워 지옥을 오가면서 말이다.



까탈시럽다: 까탈스럽다의 경상도 방언.


묵고재비: 먹는 것에 너무 집착되어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 경북 밀양 방언이 먹고잽이라고 한다. 아마도 묵고재비는 먹고잽이의 경상남도식 표현인 듯한데, 먹고잽이의 사전적 의미는 좀 과격한데 반해 묵고재비는 어른들이 먹성 좋은 아이들에게 쓰던 애정표현 정도의 수준이다. '아이고 우리 똥강아지~' 같은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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