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터키] #1 한 뼘 또 한 뼘

프롤로그

by Sophie




애초부터 '이스탄불'이어야만 해서 이스탄불로 오게 된 건 아니었다.

그저 일해보고 싶은 회사가 이스탄불에 있었고, 그래서 이곳에 온 것뿐이었다.

이스탄불,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곳. 아랍과 서양의 문화가 뒤섞여 공존하는 곳.

아랍에서 살았던 2년 간의 경험 덕분에 나는 마치 원래 살던 곳에 다시 돌아온 마냥 별다른 적응 기간도 거치지 않고 자연스레 이곳에 정착했다. 요르단에 살며 겪은 산전수전에 단련된 내게 터키는 신사의 나라 그 자체였다. 굳이 중동 국가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터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예의 바르고, 정직하며, 신사적이었다.


요르단에서의 일상은 종종 전쟁과도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족히 넘는 언어적 성희롱과 캣 콜링, 잊을만하면 맞닥뜨리던 신체적 성추행까지.(아주 사소하게는 머리를 잡아당긴다거나 가깝게 지나가며 스치는 정도에서 크게는 직접적인 특정 신체 부위를 만지는 일로 인해 법원까지 간 적도 있었다. 아참, 길가는 우리에게 욕을 하면서 돌을 던지는 경우도 다반사!)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런 행동을 저지하거나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나를 지키는 건 나 자신이었다.


000001.JPG 요르단에서 나의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나의 집. 이 공간과 내 친구들이 없었다면 내 요르단 생활은 훨씬 힘들었겠지.


그에 반해 일 년 반을 터키에 사는 동안 내 몸을 더듬었던 건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간 여섯 살도 채 안되어 보이던 꼬마 두 녀석이 전부였다. 쫒아 가 꼬마들을 다그치니 지나가던 어른들이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내가 민망할 정도로 아이들을 혼쭐 내주었다. 이스탄불은 그런 곳이었다. 정의롭고 점잖은 다수로 인해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 그리고 도덕적인 가치가 지켜지는 대도시.


그렇게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생활은 학생의 신분으로 공부와 노는 것 말곤 할 게 없었던 이전의 해외 생활과는 많이 달랐다. 나의 일상은 출근과 퇴근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쉬는 날이면 집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과의 전화를 하며 보내곤 했다. 가끔씩 이틀 연속 휴무가 주어지면 하루는 밖으로 나가 쇼핑을 하거나 평소에 가지 못 했던 곳들을 가보기도 했다. 누군가 그때의 나에게 '이스탄불 애정도 설문 조사'를 했다면 나는 별 세 개를 주었을 것이다. 좋음, 딱 그 정도의 애정이었다.


매일 퇴근길마다 마주하는 에미뇨뉴 항구 뒤로 아름답게 저무는 노을 풍경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갈라타 다리 아래의 고등어 케밥과 홍합밥이, 한여름에도 저녁이면 불어와 머리칼을 흩뜨려놓는 초가을 같은 선선한 여름 바람이, 나를 '정말 한 번쯤 살아볼 만한 도시야.'라고 생각하게 했지만 여전히 이집트를 떠올리기만 해도 느껴지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을 느낄 수는 없었다.


20160421_192753.jpg 정말 아름다운 것을 보면 비로소 '아름답다'라는 단어의 무게를 온전히 체감하게 된다. 이스탄불을 수식할 단어를 찾다 보면 결국 돌고 돌아 '아름답다'라고 밖에 쓸 수 없음을 깨닫는


그런데 아주 조금씩 이도시가 점점 좋아진다. 여전히 사랑은 아니지만 한 뼘 한 뼘 좋아진다.


도시 여기저기를 차지하고선 몸을 비벼오는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이 한 뼘,

하나 둘 생겨나는 터키 친구들이 한 뼘,

비록 한 칸이어도 부족할 것 없는 내 방이 한 뼘,

눈을 마주치면 마주 웃어주는 그들의 미소에 한 뼘,

만원 지하철에서 날 위해 자신이 잡고 있던 손잡이를 내주는 아저씨가 한 뼘,

드물게 찾아오지만 그래서 더욱 귀한 인연들이 한 뼘,

하나씩 늘어나는 나만의 비밀 장소들이 한 뼘,

그렇게 한 뼘, 또 한 뼘.

매일 저녁마다 금빛 석양으로 물드는 골든혼처럼, 나의 마음도 매일마다 한 뼘 씩 이스탄불에 물들고 있었다.


나중에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오면 이전의 이별들만큼이나 참 많이 슬퍼하리란 걸, 이곳을 그리워하리란 걸 이제는 안다. 술탄 아흐멧 광장의 푸른 하늘과 멋진 건축물보다 집 앞 공원에 앉아 수다 떨던 시간이 더 그리워지리란 걸, 작은 내 방이 가져다주는 만족스러운 안락함이 그리우리란 걸 이제는 알아버렸다.


어느 날 이곳에 나를 데려다주었던 예측 불가한 인생은 또 어느 날 덜컥 이별을 가져다주겠지.

그러니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매 순간을 진심으로 끌어안고 사랑하는 게 전부다.


아마 내일도 이스탄불은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겠지.

한 뼘 또 한 뼘.


2015년 8월 19일, 이스탄불에서.



DSC_0159.JPG 요르단 북부에 위치한 유적지, 제라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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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04_134005.jpg 내 사랑, 아야 소피아. 매일 출근길마다 아야 소피아를 보면서 출근을 한다는 건 축복 그 자체였다.
IMG_8304.JPG 흑해에 맞닿은 작은 마을 아마스라.
IMG_9833.JPG 탁심 뒷골목은 내가 탐험하기를 가장 좋아하는 곳 중에 하나다. 목적지 없이 그냥 마음 가는 대로 걷다 보면 마주하는 순간들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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