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터키] #5 열아홉, 순수.

결국엔 사람, 첫 번째. (1/3)

by Sophie




결국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이틀에 한번 야경 투어를 가는 카페.
거기에서 일하는 남자애가 나를 좋아한단다.

그 애의 이름은 케난.
멀대처럼 큰 키에 장난기 가득한 눈과 귀여운 미소를 가진 알바생이다.

거의 4개월을 꼬박꼬박 얼굴도장을 찍다 보니 그 애는 나를 기억했다. 아니, 카페에 있는 대부분의 직원들이 날 알았다. 하지만 겨우 주문하는데 그치는 내 터키어 실력을 알았기에 그들과의 소통은 인사와 안부를 물으면 끝나기 마련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내게 그 애는 유난히 자주 다가왔다.


그애가 사진 찍자. 뭐 먹을래? 오늘 어떻니?하고 속사포처럼 물어오면 나는 한 단어 짜리 대답을 겨우 건네고, 그러고 나서 그 애가 더 긴 질문을 해오면 언제나 나는 완전히 길 잃은 표정으로 "안라마듬."(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라 답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언제나 우리의 대화는 답답함이 담긴 너털웃음으로 끝이 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애가 나는 주문하지도 않은 카푸치노를 갖다 줬다. 위에는 하트가 수줍게 그려져 있었다.
원래 있는 건 줄 알았더니 다른 손님 찻잔엔 그냥 우유 거품뿐이다. 나는 이거 시킨 적 없다 하니 자기 선물이라고, 마음이라며 웃고 간다.

이틀 뒤 다시 카페에 갔을때 지난 커피에 대한 답례로 손님들에게 주는 작은 기념품 옷핀을 그 애한테도 두어 개 주었다.

아.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단순한 행위가, 나의 사소한 답례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이틀 뒤, 그 애가 잽싸게 다가왔다. 매니저쯤 되는 아저씨가 이미 우리 테이블의 주문을 받고 계신 중이었다.

아저씨가 있거나 말거나 그 애는 잠깐만, 하더니 재킷을 열고 안에 입은 셔츠를 보여준다. 셔츠에는 내가 선물했던 작은 옷핀이 달려있었다. 작은 선물에 좋아하는 그 애가 귀여워 엄지를 올려주며 씩 웃었더니 내게 물었다.

"Do you speak English?" 너 영어 해?

"Yes I do." 하고 대답했더니 그 애가 말했다.

"I love you."


나는 순간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부끄러워하지도, 주저하지도 않고 그 애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한 번 더 내가 좋다고 말했다.

주문받던 아저씨는 그 애를 보며 터키어로 뭐라고 하셨다.
'에라 미친놈. 빨리 가서 일이나 해.' 정도의 의미 같았다.
그 애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싱글싱글 웃으며 사라졌다.

주말에 동생과 외출했다가 마음이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이 야경을 보여주고 싶어 카페에 갔더니 그 애는 우리를 아주 반겼다.

터키어를 하는 동생에게 그 애는 뭐라 뭐라 하더니 통역을 해달란다.

"쟤가 언니 좋대."

"그래?"

"응 그래서 여기 살래. 너무 사랑스럽대."

"헐. 정말 어려 보이는데, 나이나 물어봐."

동생이 나이를 묻자 그 애는 말했다. 온 도쿠스.

"헐!!!!!!!!!!!! 열아홉 살이라는데?"


우린 모두 박장대소하며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 애에게 내가 몇 살처럼 보이냐 물었더니 열여덟? 열아홉? 이러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나이를 말해줬더니 정말???? 하며 눈이 커다래졌다.
손님이 부르자 서둘러 가면서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서 자기 가슴을 손으로 가리키며 안에 내가 있단다. 윽.

카페를 나와 걷는데 뒤에서 누가 오더니 같이 가던 오빠의 어깨를 잡는다. 돌아보니 그 애였다. 우리를 따라잡으려 엄청 뛰어왔나 보다.


가는 내내 동생에게 질문 폭탄이 쏟아졌다. 쟤 너무 귀여워, 좋아하는 사람 있대? 남자 친구는 있대?
덕분에 애꿎은 동생만 언니를 지키랴 대답하랴 바빠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귀여워 죽겠다는 듯 내 볼을 꼬집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방어할 틈도 없었다.


당황한 나는 반토막 짜리 터키어와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너는 베이비고, 나는 어른이야. 우리는 안돼. 미안."

"나 법적으로 성인이야."

"하지만 내 눈에 너는 어린애인걸."

"우리 엄마도 아빠보다 다섯 살 많아. 문제없어."

"…. 나한텐 문제거든?"

더 나뒀다간 큰일 날 것 같아 급히 핸드폰을 뒤졌다. 친한 이성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서 찍은, 누가 봐도 오해할 수 있을만한 사진을 꺼내 그 애한테 보여줬다.

찰나, 그 애의 표정이 바뀐다.

올라와 있던 입꼬리가 내려갔다. 배신감에 젖은 눈빛으로 나한테 묻는다.

"왜 말 안 했어?"

"…."

'애인이 있어야 말을 하지 이 녀석아.'
하지만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지는 않았다.

말없이 다시 사진을 보여줬더니 보기 싫다며 케난은 입고 있던 재킷으로 얼굴을 휙 가려버렸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순수하기도 하고, 또 미안하기도 해서 나는 그냥 말없이 걸었다.

나도 저랬지. 열일곱 살 첫사랑이었던 오빠를 보며 혼자 설레고 보기만 해도 좋고 그랬었지. 오빠의 표정 하나에, 그 메시지 하나에 울고 웃었지.

그 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케난, 우리 친구 하자. 어때?"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악수를 거부한다.


"나는 너랑 연애하고 싶어. 친구 말고."

"터키 여자애들 얼마나 예쁜데, 더 예쁜 여자애 만나. 난 할머니야."

들은 척도 않는다. 그래 지금 아무리 말해봐야 무엇하겠니.
이 애의 마음이 괜찮아지려면 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집으로 오는 길 우리는 그 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십 대의 후반에 있는 우리 셋은 그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 동생은 그런 마음을 받은 내가 부럽다 했다.
참 감사할 일이었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고 표현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받는 것.

우리는 그 애가 부러웠다. 그리고 멋지다 생각했다. 아무것도 재거나, 따지지도 않고 자기감정에 솔직한 그 모습이 부러웠고 그렇게 표현에 열정적인 그 용기가 멋졌다.

그런 과분한 마음을 받는다는 것에 그저 감사했다.
네 정거장이 꼬박 넘는 밤거리를 걸으며 우리의 주제는 첫사랑으로 흘러들어 갔고, 그 밤은 오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2015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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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목 '결국엔 사람' 챕터에서는 제가 터키에 살면서,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행하고 살았던 수많은 나라들 중에도 여전히 터키를 가장 그리워하는 건 아마도 아름다운 풍경과 맛있는 음식을 뛰어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과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으로 저는 그들에게 건네받은 소중한 마음 한 조각들을 보관하려 합니다. 각각의 인연에서 비롯된 모든 추억들이 하나같이 반들반들한 몽돌처럼 남아 여전히 제 마음을 데워주는 것처럼 이글을 읽어주시는 당신에게도 작은 따뜻함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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