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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Jun 27. 2016

꽃과 당신

지극히 사적이고 유치한 이야기




1.

꽃을 좋아한다. 돈을 벌기 위해 팔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불전에 올라온 공양물 중 쌀만큼 꽃을 기뻐하신다던, 어디선가 들은 말에도 공감한다. 꽃이야말로 '실용성과 로맨틱함은 반비례한다'는 명제에 가장 잘 들어맞는 예가 아닐까. 그렇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으면서도 사람의 감정을 황홀하게 만드는 사물이 또 있을까.




2.
만나는 동안 당신으로부터 종종 꽃을 선물받았다. 이전에는 꽃을 살 일이 많지 않았다고 했고, 지금도 (누가 봐도 여자에게 선물할 것이 분명한) 꽃을 사는 일이 쉽지는 않다고 말하는 당신은, 비교적 난이도가 낮은 '고기 사주기'나 '소맥 타주기'에 비하면 훨씬 어려운 일을 종종 해내곤 했다. 자지러지게 기뻐하는 나를 보기 위해, 고맙게도 당신은 종종 꽃집에 들어설 때의 멋쩍음 혹은 꽃을 사들고 길을 걸을때의 민망함을 견뎌주었다.



이를테면 '넌 화이트데이에 꽃도 준비 안 했냐'는 친구들의 놀림에 잠자코 웃고 있다가 지하철 사물함에서 불쑥 꺼내 주었고, 처음 둘이서 멀리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오랜 포옹과 함께 손에 쥐어주었다. 뭔가 잘못한게 있는 날 '긁적긁적 뒷통수를 긁는 듯한 느낌으로' 등 뒤에 한 송이 숨기고 있었으며, 야근으로 쩔은 나를 회사 앞에 몰래 데리러 와서는 아버지 차 뒷자석에서 마술사의 소품처럼 뿅 하고 꺼내 주었다. '요즘 여자들은 다 선물받아 봤다는 드라이 안개꽃'을 서촌 골목에서 사 준 덕분에 나 역시도 '요즘여자' 대열에 낄 수 있었고, 어머님 생신선물로 주문해 둔 꽃다발을 찾으러 갔을 때 즉석에서 나를 위한 꽃을 포장해 달라 말하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 사이사이에는 꽃이 있었다. 이따금씩 톡 튀어나오는 꽃 한송이들에는 모노톤인 일상을 단숨에 생생한 총천연색으로 물들이는 힘이 있었다. 꽃을 받으면, 나는 우선 광대가 터져라 웃다가, 찰칵찰칵 사진을 찍고, 며칠 물을 담은 유리컵에 꽂아두었다가, 시들 만하면 내 방 한 귀퉁이에 잘 말려두곤 했다. 꽃들은 오래지 않아 색이 바래고 물기를 잃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그것들을 받아드는 순간의 기억과 기쁨이 묻어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예뻐보였고, 그래서 버릴 수가 없었다.




3-1.

어느 저녁, 샤워를 하고 나와 바디로션을 바르다가 소리를 꽥 질렀다. 책장 옆에 걸어 둔 말린 꽃송이들이 깨끗하게 사라져 있었다. 범인은 같이 사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더러워서 치웠다(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며, 말을 잇지 못하고 헉헉대는 손녀딸이 이상하다는 듯 "다 마른 꽃을 안 버리고 왜 방에 두냐"고 하셨다. 그걸 버리시면 어떡하냐고, 요새는 꽃도 일부러 말려서 판다고 목이 메여 웅얼대던 나는 항소를 포기하고 내 방에 들어와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런 순수한 상실감과 폭발적인 비애감은, 음, 흠모하던 대학생 과외선생님과의 수업을 엄마가 강제로 끊어버린 사춘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다.


고2 여동생의 반응. 토끼씨=동생이 어릴때부터 안고 잤지만 낡고 더러워지자 할머니가 내다버리신(..) 인형의 이름. 그렇다. 소녀라면 이 간단명료한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꽃의 출처인 당신에게 전화해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을 할수록 눈물이 샘솟아서 꺽꺽대는 20대 후반 직장인 여성의 전화를, 직장에서 야근중이던 당신은 침착하게 응대했다. "말린 꽃을 보관할 우리 집을 사야겠네~" 라는 농담과 "앞으로 더 자주 선물해 줄게"라는 다독임에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지만, 사라진 꽃은 돌아오지 않았다.



크리넥스 티슈 한장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데, 할머니가 겸연쩍게 내 방 문을 여시더니 쓰레기통에서 건져올린 마른 꽃들을 건네셨다. 나는 울다가 사탕을 받은 아이처럼 눈물을 뚝 그치며 꽃을 살폈다. 할머니는 정말로 의아하시다는 듯 계속 '그걸 어디에 쓸거냐'고 물으셨지만, 할머니, 꽃은 어디에 쓰기 위해 간직하는게 아닌걸요.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나온 꽃들은 구겨지고 고추장이 묻어있었다(...). 나는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사학자 같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그것들을 잘라내고 닦아냈다. 꽃은 반 넘게 유실되었으나, 다행히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내게 다시 돌아왔다.



복원사업의 결과물. 눈물이 앞을 가린다....




3-2.

지난 토요일, 그러니까 우리가 만난지 498일째 되던 날, 나무가 푸르고 공기가 맑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꽃집에 들렀다. 당신은 냉큼 파랑과 연보라빛이 섞인 커다란 수국 한 송이를 골라주었다. 발랄한 꽃집 언니는 "얘는 참 제가 봐도 예뻐요. 물을 좋아하니까 자주자주 갈아주세요!" 했다. 수국축제 같은 데서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것만 보았던 수국이 매끈한 포장지와 리본에 감싸여 내 품에 안기는 기분은 생경하고도 황홀했다. 이렇게 예쁜 꽃이라니 선물할 맛이 난다며, 당신도 함께 웃었다.






글쎄, 싱싱하게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만 보아 와서 미처 몰랐던 건, 수국은 물고기와 같아서 물을 떠나면 곧바로 죽는다는 것이었다. 여행지에서 잠깐 소품삼아 들고 사진을 찍었을 뿐인데 탱글탱글하던 꽃잎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나비 날개처럼 시들시들해졌다. 다시 물꽂이에 꽂아봤지만 회생 불가 수준으로 바싹 말라가는 꽃송이에 대고 나는 애절한 목소리로 "힘내, 아직 이렇게 가면 안돼!" 하고 외쳤고(...), 고속도로를 달리던 당신은 차를 갓길에 멈추고 먹던 커피캔을 생수에 헹궈 임시 꽃병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남자친구를 두어 참 다행이라고, 고생이 많다고, 쉐킷쉐킷 캔을 흔드는 당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행히 각종 응급처치에 힘입은 수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났고, 당신이 말한 대로 포카칩 모양의 꽃잎들도 그대로였다. 그 뻔뻔하게 싱그러운 자태에 우리는 안도감 섞인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커피캔에 꽂힌 수국은 무사히 내 방에 안착했다.








4.

글쎄.

몇 번의 푸닥거리를 치르면서 새삼 든 생각은,

살면서 요즘처럼 꽃을 좋아한 적은 없었다는 것.

그리고 받은 꽃을 끔찍히 아낀 적이 없었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꽃을 좋아한다.

그리고 꽃을 주는 당신도 좋아한다.

남사스러워서 한번도 공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어쩌면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꽃을 주는 당신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진정 황홀하게 하는 것은 꽃이 아니라

당신이 건네는, 예쁜 빛깔과 향기로 화한 '사랑한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종종 행복할 테다.

처음인마냥 큰 웃음을 터뜨릴 테다.

상기된 표정으로 또박또박 고마워, 말할 테다.

그 순간 우리를 감싸는 달고 따뜻한 공기에 두둥실 취할 테다.

그렇게 오래도록 간직할 테다.

당신과, 당신이 선물하는 순수한 기쁨과,

마른 꽃의 모습으로 갈무리되어 간직될 순간들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꽃 선물하는 남자'와 '꽃 좋아하는 여자'일 테다.





500일 축하합니다 :)





-2016. 6. 27. 12:00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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