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도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많아요.
일단 기억조차 확실하지 않은 2012년은 빼고
인생 낭비에 불과했던 2년 2개월의 군복무는 빼고
끝내 이어지지 못한 9년간의 연애를 빼고
헤어진 후 엉망진창이었던 5년을 지우고.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글을 쓰던 밤을
지운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를 살리려 애썼던 사람들과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문장들과
살기 위해 몸부림치던 순간과
별 일 없기에 소중했던 일상들
내가 꿈꾸고 사랑한 모든 것들이
함께 사라지고 말테지요.
흉터를 지우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지요.
얼룩을 빼버리고 나면 백지만 남을 테지요.
당신의 날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과
부르지 못하게 된 이름들이 아니었다면
당신은 이곳에 있지 않을 테지요.
당신은 당신이 아닐 거예요.
그렇게 바람이 불었던 것은
먼 여행을 떠나는 당신의 날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많은 비가 내린 이유는
당신에게 깃든 초록의 생명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였죠.
그토록 어두웠던 밤들은
당신 안에서 빛나고 있는
별을 발견하기 위해서였죠.
그렇게까지 많은 일이 생겼던 이유는
한 가지 색으로 무지개를 그릴 수 없기 때문이었죠.
당신의 삶을 세상의 빛으로 물들이기 위해서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