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鄕愁

향수병나발

by Space station


4th Feb





수년 전 J와 이별하던 날, 그녀는 내가 그리울 때마다 이 향을 맡고 싶다며 반쯤 남아있던 나의 향수를 달라고 말했었다.

지난 향은 무력으로 그 시절 그 자리에 나를 홀로 데려가 긴 여운을 풍긴다. 세월에 잊고 지냈던 그녀의 향수 중 '여름에 뿌리는 용'을 지하철에서나 우연히 맡게 되었을 땐 여름날 활짝 웃는 그녀의 입이 벌어지며 나는 마른 침소리, 속눈썹을 간질이는 콧바람 또한 느껴지는 듯하다.


향수에 대한 생각을 시작한 것은 매일 출근 후 엘리베이터를 타면 깨끗한 헌 종이 냄새, 채도 낮은 연두색 냄새, 건축물 석재 냄새 같은 것이 섞여 난다.

매일 맡아도 정들기 어려운 이 냄새를 언젠가 그리워하는 날이 올까를 생각하다 여기까지 왔다.


다달이 다니는 미용실은 여의도에 있는데 여의도역을 거닐 때 맡는 따듯한 참기름 냄새, 바쁜 회사원 냄새엔(남성 버전, 여성 버전이 나뉘어 있음) 여의도에서 근무할 당시 회사의 각종 가스라이팅과 횡포, 그녀와의 이별 등을 상기시켜 급격하게 우울해진다. 언젠가 이 냄새를 미워하지 않는 날이 올까 까지 와버렸다.


압구정에선 낡은 구두굽이 걸음걸음에 조각나 헨젤과 그레텔처럼 흔적을 남기는 노인네 냄새

몇 달 전은 그녀에게서 나던 드라이클리닝 냄새의 로션을 바르며 우리의 첫 만남을 생각했고, 어떤 날엔 크림 리조또에 든 어린 바질잎을 씹곤 시절 불안에 술을 진탕 마시고 신나게 춤을 췄다.


스치는 그녀에게선 피아노 선생님의 향을 맡고 어떠한 사람에게선 목욕탕 냄새 오래된 노래방 냄새 땀냄새라 주장하던 체취를 맡았다.

잔향은 지독하다.

정작 그리운 것은 익숙함에 무엇을 맡아낼지 그 또한 어른의 일일까

지금 나는 토마토와 맥주의 냄새를 그저 킁킁







쉼터는 왼쪽이네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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