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을 굽다가...

때로 우리 집도 아우슈비츠가 된다.

by 세둥맘

오랜만에 농산물 직매장에 들렀다. 2주 전만 하더라도 태풍과 긴 장마에 농작물이 별로 없어 빈 매대가 그득해서 마음이 아팠는데 오늘은 매대마다 야채들이 그득히 누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채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노라니 쪽파가 눈에 띄었다. 대가 가늘고 야리야리한 것이 저번에 사둔 오징어와 파전을 구워 먹으면 딱일 것 같았다. 얼른 장바구니에 쪽파를 집어넣었다.


쪽파를 깨끗이 씻어서 먹기 좋게 썬 다음 부침가루와 찹쌀가루 계란 두 개를 넣어 반죽을 만들었다. 마침 지난주에 만들어놓았던 멸치 육수물이 냉장고에 있길래 물 대신 넣었다. 그냥 물을 넣어서 반죽을 만들어도 좋지만 이렇게 육수물을 넣어서 반죽을 만들면 훨씬 감칠맛이 나고 맛이 좋아진다. 반죽에 쪽파 썬 것과 오징어를 작게 채 썬 것을 넣어 몇 바퀴 휘휘 저어 골고루 썩었다.


설거지하기 좋게 일부러 작은 프라이팬을 꺼냈다. 마침 프라이팬 크기가 접시에 담기 좋을만한 사이즈의 전 크기와 일치한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따르고 전 반죽을 국자로 두어 번 푹 떠서 얇게 펴놓고 조금만 기다리면 지글지글 소리와 함께 전이 익어간다. 맛있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한다. 문을 꼭 닫고 원격강의를 듣고 있던 둘째가 냄새의 유혹을 못 이기고 부엌으로 달려 나온다.


"엄마, 뭐해?"

"우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전이다!"

"엄마, 내가 전 제일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둘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전을 먹을 생각에 좋아서 온 집안을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몇십 년 살림을 살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있다. 전을 구울 때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전을 얇게 펴서 프라이팬에 올려놓은 다음에는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섣불리 뒤집으려고 애를 쓰다가는 전이 이리저리 찢어지는 참상을 맛보게 된다. 불을 약불로 해놓고 한 3,4분 기다리다 보면 가장자리부터 노릇노릇하게 익으면서 전의 윗부분도 약간 꾸덕꾸덕하게 될 즈음 그때 뒤집개를 이용해 뒤집어야 동그란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살림과 요리의 고수들은 한 손으로 전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하늘로 툭 쳐올려 뒤집는 기염을 발휘하기도 한다. 나는 아직 그 경지까지는 도달하진 못 했지만 기다려야 이쁜 보름달 모양의 전을 구울 수 있다는 것쯤은 이미 터득하고 있다.


전 하나 굽는 데에도 인생의 묘미가 숨어있다. 너무 급하다고 서둘러서 강불로 했다가는 채 익지도 않은 채 타버리고 만다. 안에서 서서히 익기를 기다리지 않고 뒤집었다가는 갈기갈기 찢어져 모양이 틀어지고 만다. 오늘은 알맞게 구워진 전을 기술 좋게 뒤집으면서 내 삶을 반성해본다. 나는 전을 구울 때는 기다리면서 다른 일에는 기다리지 않는지?


요 며칠 큰 딸과 냉전 중이다. 대학교 4학년이라면 내 상식에선 밤을 낮 삼아 취업 공부를 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영 그런 기별이 보이지 않는다. 중학생인 막내 동생보다도 공부를 더 하지 않는 모양새다. 며칠 전에는 폭발해서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내가 알아서 잘하는데 왜 자꾸 그러는데?"

큰 딸이 쏘아붙인다.

때로 우리 집도 아우슈비츠가 된다.

책을 읽는데 가슴 아프게 한 구절이 와 닿았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읽고 한 학인이 써 온 글이다
"아우슈비츠를 세운 건 괴물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을 사랑한 보통의 독일인이었다. 그러므로 아우슈비츠는 언제 어디서나 생겨날 수 있다. 때로 우리 집도 아우슈비츠가 된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따지는 아이에게 '엄마 방식을 따르지 않으려면 딴 데 가서 살아'라고 말하는 나. '이곳에 이유 같은 건 없어'라고 말하는 수용소 감독자의 말과 똑같지 않은가"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110쪽-


며칠 전에 내가 딸에게 했던 말이다.

"그렇게 살려면 이 집에서 나가라!"

나도 아우슈비츠의 괴물이었던 것이다.


요즘같이 취업이 어려운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코로나로 모든 일상이 마비된 이 시기에 취업이라는 큰 장벽을 넘어야 하는 딸의 마음은 어떨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런 딸에게다 대고 아우슈비츠의 괴물처럼 행동했으니 굵은 소금으로 딸의 쓰린 마음을 벅벅 긁어놓은 셈이다.


보기 좋고 맛있는 전을 구울 때도 전이 스스로 서서히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데, 딸에게는 내가 너무 조급했다. 기다리자. 딸의 능력과 모든 상황이 서서히 숙성될 때까지. 그러면 내가 억지로 뒤집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살림 고수의 그것처럼 하늘로 휘 날아오르며 뒤집혀지겠지. 믿고 기다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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