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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찌 Sep 18. 2023

고객은 조직이 무능해지는 걸 막는다.

안락의자 비즈니스는 성립하지 않는다.

"모르면 물어봐요. 도움을 받을 수 있는데 안 받으면 리소스 낭비가 더 커지니까 빨리 물어보는 게 더 나아요."


인턴이 새로 들어오면 해주는 말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업무에 익숙해져야 하는 사람에겐 모든 일이 낯설고 어렵다. 하지만 질문이란 게 사람의 수준을 나타낸다느니, 질문하기 전에 생각해 봤냐느니 하는 말들이 입을 무겁게 만들기 때문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주는 것이다.


내 '담당'이 아니라 생각해서 '방임'했던 마케팅 인턴 친구의 경우, SQL로 1분이면 뽑을 수 있는 데이터를 혼자서 하루 종일 긁어모아 콘텐츠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고 정말 미안했던 적이 있다.(+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나는 내가 도와줄 수 있든 없든 간에 먼저 고민을 듣고 판단하는 게 낫다는 주의다.


그런데 역시나 사람이란 게... 남의 일에는 감 놔라 배 놔라 잘하면서 내 앞가림은 못하고 있었으니...(두둥)

세일즈 업무를 얼떨결에 맡은 내가 매뉴얼에 따라 얼레벌레 세일즈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대표님 덕에 좋은 세일즈 강의와 세미나를 몇 개 듣게 됐다. 세일즈에 기초 개념이 생긴 나는 나름 고객 페르소나도 그려보고, 고객 경험도 설계해 보면서 우리의 고객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 조직은 2개의 프로덕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 빼고는 아무도 프로덕트 세일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나마 고객을 이해하고 있는 팀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세일즈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큰소리치기 마련이었고, 나름 세그먼트까지 나눠 전략을 수립하고 나니 이 정도면 준비는 됐다고 자신했다.



다행히 나의 자만과 오산을 깨부숴준 건, 모든 세일즈 강의 때마다 들었던 "고객을 만나라"는 말이었다. 고객과 건조한 이메일 커뮤니케이션 외에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컨택 포인트를 찾기가 어려워 이번에도 대표님에게 도움을 청했다. 덕분에 우리의 주요 고객사와 미팅이자, 나의 첫 '고객 만남'이 성사되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약 5개월간 세일즈를 해왔지만 그동안 추측하고, 리서치해서 모은 지식보다 고객을 만났을 때 얻는 인사이트가 10배 이상 임팩트가 컸다. 고객은 상상 속에서 상식과 지식을 오려 붙여 만든 콜라주가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이었다.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살고, 판단하는 존재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서 얻은 인사이트만으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왜 나는 그들이 원하는 걸 검색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우리의 상품을 사주던 고객의 진짜 니즈, 페인포인트를 알지 못한 채 내 입장에서만 사고했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아마 고객 입장에서 나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전문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걸 가지고 있는 도매상 정도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니 고민을 얘기할 필요도 없고, 서로 아쉬울 것 없는 싱거운 거래만 이뤄졌던 것이다.


고객을 만나는 건 대표가 해야 할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글쎄. 스타트업에서 일을 하는데 고객을 만나지 않는 구성원이 과연 어떤 임팩트를 만들 수 있을까? -- 이런 과장법을 서슴없이 사용할 정도로 고객을 만나는 경험은 중요하다. 고객을 만나는 걸 극도로 피해왔던 나라서 더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있다. 고객 응대는 '내 일'이 아니라 대표나 CS 매니저가 해야 할 일이라고만 여겨왔기 때문에.



고객과 이야기를 하며 내가 정리한 사실은 이렇다.

1. 고객은 나와 우리 팀이 무능해지는 걸 막을 수 있다.

2. 고객은 우리 제품을 우리가 기획한 의도대로 쓰지 않는다. 고로 우리 팀의 에고가 잔뜩 들어간 제품은 고객 앞에 나아갈 땐 자아를 버리고 고객이 원하는 언어로 다시 쓰여야 한다.

3. 고객은 세일즈맨을 원하지 않는다. 고객은 전문가를 원한다.



"안락의자 인류학자"라는 말이 있다.

인류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그중에서도 '문화'에 초점을 맞춘 학문인데 참여관찰법, 인터뷰 등 적극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다른 문화를 심도 깊게 연구한다. 그런데 초창기엔 문헌에 의존해서 방에 틀어박혀 '상상'으로만 연구를 하는 학자들도 있었는데, 이런 학자들을 가리켜 안락의자 인류학자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래도 인류학자는 이미 없어진 부족이나 옛날 민족을 연구하기라도 했지, 나는 살아있는 우리 고객을 연구해야 하는 입장인데 모르면 물어봐야지 어떻게 혼자 알아내 보겠다고 삽질을 하고 있었는지. 인턴 친구의 하루 날린 건 아까우면서 정작 내 5개월 날아가는 건 모르고 있었던 게 웃프지만, 그래도 드디어 안락의자 세일즈가이에선 벗어난 것 같아서 다행이지, 뭐.


[주의] 초기 기업이라면, 초짜 스타트업인이라면 절대 나처럼 안락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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