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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Dec 31. 2022

다 같이 배고팠던 중국 유학시절에


 2000년대 초반, 나는 중국 베이징 체육대학교에서 무술유학을 하고 있었다. 갓 스무 살이 되어 처음으로 부모님 품을 벗어나 먼 길을 떠났다.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어렸던 나는, 새롭게 시작될 나의 인생 2막을 기대하는 마음에 설레는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중국 각지에서 베이징으로 상경한 중국 친구들 중에는, 국경을 넘은 한국보다 더 먼 지방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다. 나보다 훨씬 더 긴 시간 기차를 타고, 나와 같이 베이징이 처음이었으며, 베이징 말투에 적응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양한 지역에서 제각각 베이징에 모인 친구들은, 집 떠나 밖에서는 친구가 부모니, 친구들끼리 서로 의지해야 한다며 서로를 살뜰히 챙겼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가난했고 고만고만하게 운동도, 공부도 열심히 했다.

 무술의 나라 중국에서 만난, 무술을 전공하러 온 친구들은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던 현란한 기술과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에게 그만 반해버렸다. 친구들은 부모님이 주신 돈으로 공부하는 책을 살 수는 있지만 클럽에 가거나 유흥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생각이 바르고 곧아 보여서 나는 친구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중국생활에 동화되어 갔다. 새벽에는 그들과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운동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오전 수업을 듣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수업을 듣고, 저녁 식사를 한 후에는 도서관에 앉아 도서관 문이 닫을 때까지 오늘 배운 내용이 증발할 새라 책을 보고 또 봤다.

 대학생이니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장학금을 받는 등의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었으나, 당시 베이징의 맥도날드 아르바이트 한 시간 시급이 당시 환율로 600원(4위안)이었다. 유학생에게는 장학금 제도 따위가 없었으므로 부모님이 주신 생활비를 아껴 쓰는 것 외에는 돈을 버는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 부모님도 시급 600원을 벌 바에야 중국어나 제대로 배워 오라며 일자리 찾는 것을 만류했다.     


 우리와 절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친했던 궈칭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20살이라고 하기엔 꽤 오빠 같아 보이는 그는, 해맑아 보이는 듯 싶다가도 나이답지 않은 다크한 구석이 있었다. 궈칭은 늘 바빴고 도서관도 혼자 다니고 운동도 혼자 했으며 학교 식당에서 밥도 혼자 앉아 먹었다. 오며 가며 반갑게 인사하고, 체육 수업 시간에 줄을 서면 죽이 맞아 함께 장난치며 놀았지만 그 외의 시간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친구였다. 중국 학생들이 쓰는 숙소는 유학생들의 숙소와 달랐는데, 저녁 10시가 되면 집합을 한 후 출석 체크와 함께 단체 소등을 하고, 아침에도 점오와 체조를 했다. 궈칭은 남자 기숙사의 대장으로 친구들의 출석을 관리하고, 혹시 못 온 친구들이 있으면 적당히 둘러대주고, 문이 잠긴 후 1층 기숙사 창문으로 몰래 친구들을 넣어주는 등, 의리 있는 친구였다. 모두들 궈칭을 좋아했다. 공부도 1등이었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물, 스물 하나 남짓의 어린아이였는데, 지금의 나보다 훨씬 진중하고 사려 깊었던 면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느 때처럼 학교 식당에 여자친구들과 떼거지로 모여 식사를 했다. 학교 식당은 식판에 고기반찬과 볶음밥, 야채반찬, 국까지 푸짐하게 담아 계산을 해도 한국 돈 700원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저렴하고 알찼다. 나는 멀리 구석진 자리에서 뒤돌아 앉아 있는 궈칭의 식탁에 식판이 없는 것을 보았다. 식당에서는 밥을 지은 솥에 물을 가득 넣고 끓인 흰 죽을 무료로 배급했는데, 궈칭이 그것만 연거푸 두 그릇을 떠서 먹고 나가는 것이었다.

 “궈칭은 어째서 밥 안 먹고 죽만 먹고 가지?”

 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쟤 가끔 돈 떨어지면 밥 먹을 돈 아끼느라고 그래.”

 “내가 사주고 싶다.”

 “그러지 마. 궈칭 자존심이 얼마나 센데.”

 야채 잔반들을 잔뜩 남겨 식판을 비우러 가는 내가 죄스러웠다. 그 후로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가 있거나, 몇몇이 모여 양꼬치 먹으러 갈 때, 누군가의 생일 파티 때, 난 궈칭이 오는지 눈여겨 보았다. 하지만 궈칭은 절반은 오고 절반은 오지 않았다. 그는 늘 바빴고 무언가 하고 있었다. 열심히 사는 궈칭의 성적은 늘 1등이었고 다행히 그는 학비와 기숙사비를 면제 받아 공부를 했다.     


 2학년이 되고 궈칭이 알바 자리를 구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매주 일요일에 어느 사설 체육관에 출강을 나가서 태권도를 8시간 가르치면 한국 돈 1만 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궈칭은 왕복 300원 하는 버스비가 아까워 학교 친구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가는 데 1시간, 오는 데 1시간을 달렸다. 한 번은 비 오는 날 우비를 입고 자전거 운전을 하다가 미끄러져 흠뻑 젖고 돌아와서는, 갈 때 미끄러진 것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알바를 해도, 궈칭의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 달에 4만 원을 벌어, 그마저도 고향 집에 나누어 보내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빠가 없는 외아들이었다. 엄마는 나이가 아주 많아서 경제활동을 거의 못한다고 했다. 궈칭이 사는 시골 마을에서는 아이가 대학을 가는 것 자체가 경사인데, 궈칭은 베이징이라는 대도시의, 그것도 체육대학으로는 일류인 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궈칭의 엄마는 궈칭에게, ‘이로써 네가 할 수 있는 평생의 효도를 다 했으니 절대 용돈을 부치지 말라’고 했다지만, 궈칭은 공부도 1등으로 장학금을 타면서 집에 돈까지 벌어 보냈다. 물론 나와 다른 친구들도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그래도 당구장 가서 포켓볼도 칠 줄 알았고, 한 학기가 끝날 때면 노래방과 클럽에 가서, 촌스런 춤사위를 날리고 왔는데.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매일 같은 루틴으로 자기 관리를 하는 궈칭의 집념은 우리가 감히 이길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3학년이 되자 궈칭은 선생님들에게 선발되어, 본과생임에도 사무실에서 조교처럼 일하게 되었다. 손톱만큼의 월급을 받으며, 전보다 더 바쁘게 일하며 다녔지만, 그래도 더 이상 배는 곯지 않고 공부를 하는 눈치였다.     

 졸업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수석으로 졸업한 궈칭은 대학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연구생이라 불리는 석사 과정은 당시 중국 친구들 사이에 꽤 명예로운 일이었다. 그는 더욱 바빠졌고 석사 과정에서도 전체 우리 과의 대표 자리를 맡았다. 나는 궈칭과 본과 4년, 석사 3년 도합 7년을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예의 그 친하지만 친하지 않은 적당한 사이를 유지했다.

 추운 겨울이었다. 그즈음 궈칭은 중고 자전거 한 대를 한국돈 7500원에 구매했다. 자전거 도둑이 많은 중국에서, 아마도 누군가의 자전거를 훔쳐서 재조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녹슨 체인과 고르지 않은 휠의, 칠이 다 벗겨진 낡은 자전거였다. 걸어만 다녀도 볼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이 베이징의 칼바람은 무서웠다. 그날도 우중충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지독한 날이었는데 궈칭이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앞바퀴가 바닥의 푹 파인 홈에 걸려서 부앙하고 크게 날아 얼굴부터 떨어졌다고 했다. 우리는, ‘무술을 전공한 애가 공중 돌기를 해서 완벽한 마보 착지를 해야지 어쩜 저렇게 순발력이 떨어지냐’며 농담을 하며 그의 숙소를 찾았다. 궈칭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로 앞니가 다 깨져 입과 코가 퉁퉁 부었고,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토하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다며 큰 병원에 가서 머리 사진을 찍어 봐야 한다고 누가 이야기했는데, 우리에게는 병원 갈 돈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마치 양호실 같은 저렴한 학교 병원에 다녀온 궈칭은, 별다른 소견 대신 약 한 봉지와 푹 쉬라는 말만 듣고 왔다. 밤새 주기적으로 토하는 것이 멈추지 않자, 궈칭은 같은 방 리쉰에게 실눈을 뜨고 부탁을 했다.

 “리쉰, 만일 내가 죽으면 내 책이랑 운동기구, 옷 같은 거... 다 너랑 친구들이 알아서 나눠 가져. 그리고 내 책상 세 번째 서랍에 통장이 하나 있거든. 그거 내 전재산인데, 우리 엄마에게 꼭 좀 전해줘. 알았지?”

 리쉰은 심각하게 비번을 물어보며 통장을 꺼냈다고 했다. 통장안에는 학교를 다니며 궈칭이 5년 넘게 모은 1200위안, 한국돈 18만 원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충분한 휴식을 취한 궈칭은 며칠 후 되살아났다. 그는 석사 졸업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했고, 우리 동기들 중 유일하게 학교에 남아 사무직으로 빠른 취업에 성공했다.

 7년이나 살았던 베이징을 떠나는 내가 눈물을 글썽거리자, 궈칭이 그랬다. 나중에 베이징에 돌아오면 나를 찾으라고. 내가 너의 친정娘家이라고. 하지만 졸업 후 나는 단 한 번도 학교를 찾은 적이 없었고, 제2의 고향이라 여기던 베이징에서의 기억은 점점 잊혀 갔다.     


 졸업 후 한참 연락이 없다가 오 년 전쯤, 위챗에 중국 동기들과의 단톡이 만들어졌다. 잊고 있던 베이징의 옛 기억을 새록새록 떠올리며 호들갑스럽게 반가운 친구들을 찾아 연락을 했다.

 그중 궈칭의 프로필이 보였다. 아내가 되는 사람의 뒷모습과 아이의 작은 발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궈칭은 서른이 넘어서야 가정을 이루고 귀한 아이를 얻었다고 했다. 중국 친구들은 보통 대학 졸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20대에 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궈칭 혼자 노총각 소리를 한참 들었음에 틀림없다. (네 저만 아직 중국 친구들 사이에서 시집을 안 간 걱정거리입니다.)

 내가 먼저 개인톡으로 인사를 하니.

 “오랜만이다, 이혜미 동기”

 라며 말을 건넸다. 궈칭답다. 정말 안 친했던 사람처럼 성까지 붙여서 이혜미동기라니. 잘 지내냐고 이것저것 물어보았지만 궈칭답게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하고, 언제 학교 한 번 오지 않냐는, 오면 자신을 찾으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했다.

 “너희 부모님은 다 건강하시니? 집안사람들 다 잘 계시고?”

 궈칭이 물었다. 나도 궈칭의 엄마 안부를 물었다. 아직 고향에 계시냐며. 궈칭은 ‘너 우리 엄마를 기억하냐’며 반색을 했다. 자신이 베이징에서 취업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를 베이징으로 모셨다고 했다. 지금도 엄마가 고령이지만 건강하셔서, 집 근처에 살며 자신의 아들을 봐주고 계신단다. 그의 소식을 들으니 참 행복했다. 그 안정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궈칭이 그동안 흘린 피땀의 무게가 얼마만큼일까. 궈칭의 엄마는 궈칭이 그렇게 고생하며 학교 다녔던 것을 아실까. 그럼에도 아들이 저렇게 훌륭하게 자리를 잡아 주어 얼마나 행복할까.


 앞으로 자주 연락 하자며 끝인사를 했지만, 적당히 거리가 있는 나와 궈칭은, 거의 안 올리다시피 하는 서로의 피드에 좋아요 정도만 눌러줄 뿐 그 후로도 별다른 연락을 하진 않았다. 다만 나는 멀리서 진심으로, 젊었을 때 실컷 미리 고생해 둔 궈칭의 앞날이 무탈하고 편하기만을 바래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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